질문자 :
저는 월터 윙크의 "the Powers that Be"를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윙크박사는 성전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내쫓고, 채찍을 휘두르는 등의 행동을 하신 것에 대해 그 행동이 폭력적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다른 부분에서, 윙크박사는 하나님은 히브리성경에서 때때로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분으로 묘사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비폭력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동이 폭력적이 었다고 보는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때때로 폭력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지닌 불변의 성격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한 반응양식으로서 상대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캅 교수의 답변 :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결코 폭력적인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는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와 설득적으로 관계를 맺는 분이시지, 강압적으로 관계를 맺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가운데서 항상 최선의 방식으로 행동하심으로써 우리를 유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들을 알려주심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확장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폭력'은 대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이 예수님안에서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폭력적인 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방식이 언제나 편안하고 유쾌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서 상당히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각각의 계기(occasion)는 '최초의 지향'(initial aim)을 신으로부터 부여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신의 이러한 기능은 그리스사상이나 불교 사상에 나타나 있는 사물들의 냉혹한 작용과 유사하다. 최초의 지향은 그 막다른 골목 impasse에 있어 최선이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최선의 것이 악이 될 경우, 신의 잔인성은 재해의 여신 아테Ate로 의인화될 수 있다. 쭉정이는 불속에 던져진다.."(과정과실재, P.244, 번역판 441쪽)
이러한 '폭력'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불어오는,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가슴속에 불어오는 거대한 호흡이 - 한 거대한 외침 - 있는데, 우리는 그를 신이라 부른다. 식물의 생명은 고여있는 웅덩이 옆에서 움직임없이 잠들어 있기를 원하나, 그 외침은 그 생명안으로 뛰어들어와 폭력적으로 뿌리를 흔들어 댄다. "떠나라, 대지를 향해 가라. 가라!"(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레코 보고서, 1965, pp. 291-292) 카잔차키스는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고 인간을 향한 신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는 피조물들의 저항과 신의 고집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외침은 설득적으로 기능하지, 강제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외침의 지속성과 고집은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또한 인간의 폭력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설득적이라는 말은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은 최선의 방식으로 설득하신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강제를 사용하는 것은 보통의 접근방식과 비교해 볼때 실패와 절망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사에서 강제는 종종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어린 여자아이가 차에 치일뻔한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 아이가 길에서 나오도록 설득할 시간이 없다면, 그녀를 폭력적으로 잡아채는 것은 그녀의 생명을 구하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방식이 이와같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위해 우리를 부르신 적이 있습니까?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나의 대답은 확고합니다. 만일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 대학살을 막고 전쟁을 빨리 끝내는 일이라면,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계획을 지지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이보다는 더 약한 정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사용하여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생명은 약탈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들이 희생됩니다. 확실히 인간의 생명은 다른 생명에 대한 거대한 학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그러한 약탈은 정당화를 필요로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파괴해야한다는 사실은 파괴가 악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악이기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어떤 과정사상가들은 이러한 이유로 채식주의를 선택합니다. 많은 과정사상가들은 세상에 미치는 인간 폭력의 규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폭력을 감소시키는 것은 도덕적 명령입니다.
인간사의 목표는 가능한한 설득적인 방법으로 폭력을 최소화하면서 사태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설득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집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항상 타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증대시키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끼치고 있는 파괴적인 폭력을 줄이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와서 우리는 이것이 다른 생명들과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전체에 대한 우리의 폭력은 한 종으로서 우리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풍요와 안락을 누리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조만간 우리보다 앞서 고통받았던 지구의 생명들을 따라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답은 이것입니다. 과정사상가들은 완전히 비폭력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비폭력의 모델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정신학자 마조리 수코키(Marjorie Suchocki)가 최근에 책을 하나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불필요한 폭력이야말로 죄의 근본적인 성격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강조점은 확실히 과도한 폭력을 반대하는데 있습니다. 이는 우리시대의 폭력적인 관습과 사회구조의 문제와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 번역 : 장영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