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관상 기도를 통한 영적 성숙에 대한 연구 26/ 향심기도(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향심기도

by 지심 정경호 2006. 3. 23. 09:17

본문

반응형
 

  #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거룩한 단어란 지향을 돕기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이다. 다시 말해서 향심 기도의 지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있는 상태에서 분심들이 지향을 방해할 때 그 방해로부터 지향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표지판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는 단어가 거룩해서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그 자체가 거룩하기에 거룩한 단어라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지향을 돕기 위해서 사용되는 거룩한 단어는 어떤 사람에게는 시각적인 영상이나 호흡 등으로 대치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것이 굳이 단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거룩한 단어는 지향을 돕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일 뿐임으로 거룩한 단어나 시각적 영상이나 호흡을 통해서 지향을 빼앗겼을 때 다시 지향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한 단어나 그 외의 대용물이 어떤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경우는 그것이 하나의 분심이 될 수 있으므로 큰 의미가 없는 것을 거룩한 단어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단어가 기도 전에 정해졌을 때에는 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치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거룩한 단어가 기도 중에 바뀌게 되면 그 자체가 바로 사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한 단어가 사고의 유발을 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거룩한 단어의 낱말이 짧아야 한다.

거룩한 단어는 향심 기도의 목적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향심 기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떠나보내는데 있지 않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초연해지는데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의지가 그러한 사고에 집착에 묶여 있을 때 거룩한 단어는 그러한 사고의 묶임에서 초연해지도록 돕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연해짐을 통해서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고 맡겨 드리는 깊은 신뢰가 있어지게 되며,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깊어짐을 돕는 차원에서의 거룩한 단어는 기도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고, 이러한 큰 의미 없는 사고이기에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현상도 거룩한 단어는 받아들이고 떠나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기다림, 즉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는 무제한의 기다림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우리가 일상적 사고에 젖어 있어서 그것들로부터 깨어있지 못하는 우리의 정신이 그것들을 비워냄으로 인해서 우리의 정신이 하나님이 계신 마음의 문을 노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깨어있음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열망, 즉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드리고자 하는 고백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열망이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의 열망에 의해서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 안에 존재하시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지향에 대한 깨어있음에 표시로써 거룩한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열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동의하고 기다리는 것일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거룩한 단어를 동방정교회의 예수의 기도처럼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되풀이해야 하는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처음 향심 기도의 수련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거룩한 단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거룩한 단어의 기본적인 법칙은 사고가 우리의 의지와 지향을 방해하고 사로잡을 때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이러한 거룩한 단어가 사용될 때 사고의 사로잡힘이 없는데도 계속적으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때의 거룩한 단어도 사고와 잡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거룩한 단어를 버리고 지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처럼 “거룩한 단어는 하나의 몸짓으로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지향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통해서 계속 수련하다보면 내면의 가장 깊은 수준에 들어가게 되고 이러한 거룩한 단어를 통해서 내적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내적 평화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적 평화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잠깐 이 평화를 맛보더라도 분심들에 의해서 다시 일상적인 곳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거룩한 단어와 사고(분심)와의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 안에 있는 사고는 우리를 다시 유혹에 빠뜨림으로 내적인 고요함을 잃게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오는 것뿐이다. 이러한 거룩한 단어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지향을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지향을 보호하는 창과 방패의 역할을 거룩한 단어가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련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가장 깊은 거룩한 단어인 내적 침묵을 만나게 되고, 이러한 깊은 영적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거룩한 단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됨을 알게 된다. 정리하자면, 거룩한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단지 지향을 돕는 도구로써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내면의 깊은 곳에 도달하게 되고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현존과의 접촉이 있을 때 거룩한 단어는 사라지게 되는, 기도를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단어로 기도의 지향을 할 때, 우리에게 매우 심각하게 그 지향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거룩한 단어의 사용의 의미와 근본적으로 향심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길이기에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