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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서감상문 / 헨리 나우웬의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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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심 정경호 2006. 5. 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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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의 『아담』을 읽고

-모든 사람은 참된 스승이 될 수 있다-

                         

                                                                                글 / 지붕과 쉼


 아담이라는 조그마한 책자를 손에 들었을 때 ‘아담’이라는 이름에 대한 생각이 혹 ‘성경’의 창세기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차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식상한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들의 전개가 있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을 때, 헨리 나우웬이라는 이름이 책장을 넘기게 하였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이야기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들이 전개됨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한편으로 호기심이 자극되어서 숨 쉴 틈 없이 책을 읽게 되었다.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사제로써 한때는 예일, 노틀담,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의 직임을 감당하던 분으로 그의 생애 말년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L'Arche) 데이브레이크(Daybreak) 공동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섬기며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대학 교수라는 직위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가, 어느 날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찾아간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인지 모를 몸부림치는 고뇌와 애타는 갈망을 가지고서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헨리 나우웬의 몸부림은 ‘아담’이라는 책에서 그대로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나우웬이 기독교의 ‘사도신조’에 대한 책을 쓰려고 펜을 들었을 때, 그의 머리에 한 가지 부담이 생겼다. 그것은 사도신조의 정통성이 수세기에 걸쳐서 내려오는데, 그러한 세월을 펜 하나로 표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에게 자신이 섬기던 ‘아담’이라는 지체장애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다. 그리고 ‘아담’의 죽음 앞에서 그는 하나의 신비를 발견한다. 그것은 아담의 죽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죽음에 대한 일치(union)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관에 누워 있는 아담의 시신을 본 순간부터, 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잡혔다. 그 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 닿은 사실은, 바로 이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치유 사역이라는 독특한 사명을 띠고 이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p,15)


 나우웬에게 아담이라는 인물은 섬김의 대상에서 국한되지 않았다. 그가 처음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 아담을 섬기고 이끌어주는 사람으로 내정되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아담을 통해서 ‘가르침과 지도’를 받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담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이런 장애인을 돌보는 임무가 나우웬에게 맡겨진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나우웬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라르쉬의 사명이 핵심 구성원들과 ‘함께 사는 것’ 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뉴 하우스에 있는 모든 식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일, 요리, 살림 기술은 내게 낯선 것이었다. 나는 20년 동안 네델란드와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이 기간에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장애인들과 가까이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p, 42)


 나우웬의 처음 아담을 보살피는 직책은 상당한 두려움과 어려움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신이 아담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닌, 아담이 자신의 영적인 스승, 또는 가르침을 주는 선생임을 인식하게 된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아담에게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담을 돌보며 나우웬은 교수의 직위에 있었던 자신의 무너지지 않는 교만의 실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껍질들이 얼마나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아담은 굉장한 내적인 빛을 소유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아담에게는 내면의 공간을 채우려는, 마음의 산란함이나 집착 그리고 야망이 거의 없었다.(p,30)

형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아담은 내 선생이 되어 가고 있었고, 내 삶의 광야를 헤매며 혼란 가운데 있는 나와 함께 걷고 있었으며 나를 이끌어 주었다.(p,49)


 이 부분에서 나우웬이라는 사람이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간 이유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우웬이라는 사람의 고뇌의 문제는 “광야”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흔히 ‘고독’이라는 말과 비슷한 단어가 ‘광야’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고독’이라는 말과 ‘광야’라는 말에는 상당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독’은 그저 ‘홀로 있음’에 대한 표현이라면, ‘광야’는 단순히 ‘홀로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광야는 물도 없고 나무도 없는 곳이다. 그곳은 그저 큰 변화 없는 삭막함만이 있는 곳이다. 사막과 같은 곳이 ‘광야’이다. 그러한 광야에 예로부터 많은 현인들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 ‘고행’하며 찾아 들어갔다. 그들이 광야에 들어간 이유는 단순해지기 위해서이다.


 현대는 너무 산만하고 변화가 너무 심해서,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현대의 불행이라 생각한다. 현대(Post-morden)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화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서, 아무런 생각 없이 휩쓸려 가고 있는 현상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즐거움 속에서 ‘공허’를 경험하고, 쾌락 속에서 ‘허망함’을 고백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외적인 부요함만으로는 참된 만족을 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철학’을 하지 않는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더 사모하고, 배부른 돼지는 인간이 아님을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도 현대의 복잡한 상황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요구(need)를 멈추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냉소적인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헨리 나우웬의 광야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담’이라는 지체장애인이 바로 헨리 나우웬의 ‘광야’가 되었다. 그는 아담을 통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담을 통해서 자신이 갈망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서서히 깨달아 알기 시작했다. 아담의 옷을 갈아입히며, 목욕을 시키면서 그는 아담의 눈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눈망울은 나우웬 자신을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거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거울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준다. 참된 교육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에게 맡겨진 자녀들에게 올바른 교육적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교사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그것은 교사란 학생보다 더 뛰어난 위치에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우웬이 경험한 교사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거나 우월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는데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자가 도움을 주는 자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런 노동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쓰레기와 같은 것일까? 일반적인 생각들은 이 질문에 ‘예’라 말할지 모르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아담’이라는 책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처럼, 이 세상에 모든 존재들은 각자 독특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자연만물이 흉내 내지 못하는 존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고귀함’이다. 장애를 가진 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누가 서슴없이 말할 수 있을까?


 장애는 장애일 뿐이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거동이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불편함에 대한 것이 차등 받아야 할 조건이라면, 이 세상에 ‘장애’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사람이 고귀한 것은 그 안에 ‘영혼’(혹은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혼은 육체적인 불편함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영혼이 맑아지면, 그 안에 진리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진리는 사람을 자유케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나우웬이 특별히 아담이라는 스승에게서 발견한 것 중에서, ‘집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집착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왜 일까? 그것은 욕구의 불만족에 대한 자괴감의 반응이 아닐까? 언제나 집착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에 대한 충족을 간절히 바라지만, 그러나 집착에 대한 충족이란 현실에서 그리 만만치 않는 것이다. 집착은 사람에게 여유를 빼앗아 간다.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에게나 ‘집착’은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나우웬은 자신의 영적 스승 앞에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되는 비밀들을 알게 된다.


 나우웬과 아담이 믿는 신,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이 아담 안에 가득했고, 그 사랑이 나우웬에게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을 충분하게 받은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서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남의 비밀은 고통 속에서, 그리고 매일 죽어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던, 그리고 지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불태웠던 아담의 생애를 통해서 고스란히 알려지게 되었다. 아담의 죽음 앞에서 나우웬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담의 가르침을 간직하게 된다.


 죽음이라고 하면, 흔히 ‘마지막의 날’ 정도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다. 특별히 스승의 죽음은 제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되는 ‘살아있는 기억과 교훈’이 되는 것이다.


 ‘아담’이라는 책의 독후감을 마무리 하면서 세 가지의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은 첫째, 사람이라는 존재는 진리를 찾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없다면, 언젠가 그 자신이 생을 마감할 때 ‘헛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둘째,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스승이요 삶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라는 인식 앞에서,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이 바로 ‘나를 나 되게 하는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셋째, 자녀들의 교육 문제 앞에서 어렸을 적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으로 키워진 아이들은 자신의 광야 앞에서도 진리를 더욱 쉽게 찾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우웬이 아담이 죽은 후 일 년 뒤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모습 속에서,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임을 깨닫는다. 자손들에게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한순간도 성실하게 그리고 사랑하며 삶을 살아갈 것을 다시 한 번 결심해 본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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