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 우리의 신앙고백(마16:16~24)
* 둘째날 : 하나님 아버지(마 5:43~48)
* 셋째날 : 참 신앙(마 7:21~23)
* 넷째날 : 교회의 신비(엡1:17~23)
새문안교회 사경회
1985년 1월 7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소재의 상가건물 지하공간은, 지난 1-2년의 짧은 기간동안에 급속히 알려진 한 목회자, 박영선 목사를 중심으로 설립한 남포교회 창립예배를 기념하러 모인 300여명의 교인들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대부분이 단순히 창립예배를 기념하기 위해 출석한 단회적인 참가자들일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고 등록교인의 숫자는 계속 불어갔고, 창립 후 2년이 채 못되는 기간동안 등록된 교인들은 1천 여명으로 불어났고, 5년 후에는 3천 여명의 등록교인으로 증가하였으며, 창립 14년이 지난 1999년 초 현재 전체 등록교인은 7천 오 백 여명(주일학교 1천 여명은 별도)에 이를 만큼 놀랄만한 증가를 계속하고 있고, 이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남포교회의 이 같은 성장은 실로 경이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히 교회성장 그 자체에 큰 관심을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교회의 관심을 끌기에 아주 적절한 대상이 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일반적인 한국의 대형교회의 성장을 이해하는데 제시되는 몇 가지 기준들은 주로 목회적 방법론의 적용과 교회의 조직운용 등에 기인하는 특징들을 분석하는 데에서 찾아왔다.
보통 제자훈련의 방법론이나 선교 지향적인 전투적 훈련, 그리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나 은사주의 운동 등이중요한 개념들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남포교회의 예외적인 급성장과 박영선의 목회는 위의 일반적 대형교회의 성장에 적용되는 기준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남포교회가 교회의 조직을 강조하거나 교회성장을 위한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박영선의 목회 역량에 있어서도 은사운동의 기능적 활용이나 대중적 집회성격의 강조와는 무관한 패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포교회의 성장요인은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박영선의 목회철학이 반영되는 남포교회의 목회적 특징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므로 가능할 것이다.
본 논문의 제 1부는 남포교회 성장의 한 요인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주제로서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의 성격과 특징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즉 목회자로서 박영선의 어떤 특징이 남포교회의 목회를 통해 나타났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남포교회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제 2부의 주제인 박영선의 강해 설교를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목회적 상황의 이해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1장에서는 목회자로서 박영선의 형성시기와 한국교회의 배경이라는 주제로 그의 성장과정과 소명형성과정, 그의 신학연구, 그리고 남포교회 설립과 발전 등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그가 한국사회와 한국의 역사 속에서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식의 목회적 소명의식을 깨닫게 되었는가하는 점과 함께, 한국교회의 기독교 복음 이해를 형성해온 몇몇 특징들이 한국사회의 전통적 문화적 영향의 관련성에 비추어 논의될 것이다.
2장에서는 남포교회의 설립과 그 성장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해 통계적 자료를 제시하므로써 현재까지의 남포교회 성장과정의 현황을 제시할 것이다. 여러 다양한 통계들이 남포교회의 성장과정을 비롯하여 교인들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될 것이며, 이것 또한 제 2부에 다루게 될 강해 설교에서 청중들의 구성과 성격을 이해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3장에서는 남포교회의 목회에 나타난 박영선의 목회적 특징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남포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목회패턴 뿐 아니라, 남포교회의 목회를 통해 지향해 나가는 박영선의 목회철학과 교회모델까지도 설명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제 1부의 마지막 장인 4장에서는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가 전체 한국교회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이 논의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모델이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에 공헌해왔고, 또 앞으로도 어떤 면을 더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 볼 것이다.
1. 목회자 박영선의 형성시기와 한국교회의 배경
(1) 출생과 어린 시절
박영선 목사는 1948년 11월 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부친 박근식과 모친 백연옥 사이에서 3남 2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국선교사에 의해 개종된 기독교 신자였으며 조부께서는 독립운동가였고, 외조부 역시 교회를 목회 하던 목회자로 친가와 외가 모두 한국교회의 초기에 개종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부친은 책임감이 강한 인물인 반면에, 모친은 가난한 목회자의 딸로 자라 보수적인 성품을 지녔으면서도 친화력 있는 인물이었다.
박영선이 태어난 시기는 오늘날의 의미에서도 한반도의 현대적 갈등이 시작되던 때였고, 해방직후 남북한이 신탁통치를 받으며 각각 독립국가를 건국하려던 때였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와 혼동의 상황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그의 부모는 이미 공산화가 되어버린 북한당국에 의해 숙청대상으로 몰려 평안북도 구성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그의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월남하여 서울 회현동에 정착하게 되는데, 1.4후퇴로 명명되는 월남 당시 일부 그의 가족은 북한에 남게되어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 정착한 부친은 전기설비공사를 운영하는 등 남다른 사업수완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이뤘다. 그는 이런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 매우 모험적이고 창조적인 재능이 두드러졌는데, 서울고등학교 재학시절 교내
브라스 밴드부에서 활동한 점이나,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점등은 그의 그 같은 성격을 잘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울의 도심지 중앙에 위치한 회현동의 성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고, 여기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접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있어 보다 자유롭고 정확한 이해를 갈망하는 고민을 키워가기도 했다.
더구나 그가 자란 회현동은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활발하게 상거래를 하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시장이 있는 곳으로서 그곳에서의 많은 경험들은 그에게 인생의 치열한 교육장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박영선이 성장하던 50년대의 한국은 오랜 전쟁 후 폐허로부터 재건을 시작한 시기이며, 60년대는 5.16혁명 이후 관-주도적인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경제적 성장을 활발히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한국은 해방 전까지의 약 50여 년 동안 받아왔던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던 시기였고, 그 대안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과도기였기 때문에, 성장 시절의 박영선은 한편으로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화석화되어 가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식 신문화의 도전에 의해 생긴 한국사회와 교회의 기독교적 가치의 공황 사이에서 한국교회가 浮游(부유)하며 분열되는 시기를 경험하였다. 비록 그가 한국교회의 초기 기독교 집안의 유산을 타고났을지라도, 격동기의 한국사회를 경험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있어 기독교적 성장 배경은 오히려 교회 안에서의 한국적 사회윤리의 강조와 전통가치의 보수 지향적 패턴을 강화하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 열린 통찰을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메시지가 비현실적이라는 점 때문에 교회에 대한 친화력을 가질 수 없었다.
어린 학창시절의 박영선의 학업수행능력은 매우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부 이외에 주어지는 다양한 경험들에 대해서도 기꺼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1년 때에 신앙의 갈등을 겪으며 방황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 분명한 점은 그가 목회적 소명에 대해 도전 받았던 직접적 계기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2) 소명형성 과정 (1967-1975)
이 시기는 박영선의 목회적 소명을 확인하는 시기로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사실 그의 목회적 소명은 긴 방황의 인생과정에서 경험된 것들과 함께 점진적으로 확인된 내용으로 주어진 게 사실이지만, 이 시기의 그의 경험들은 그 진폭이 매우 크고 불규칙하다는 점에서 이후의 그의 설교를 통해 반영되는 관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영선은 1969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하는데, 이는 아마도 부친의 가업에 의해 쉽게 선택된 것이라 여겨진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전공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969년 5월 해병대에 지원하여 군복무에 들어가 1971년 2월 갑작스런 수술 뒤 후유증으로의병제대를 하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부터 그는 만성적인 건강장애를 호소하며 지내게 된다. 제대 후 복학한 그는 2학년이 끝날 무렵인 1972년 12월 개인적인 체험과 함께 하나님의 목회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는데, 이를 자신의 소명으로 확인하기까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신학교 입학을 미루던 1975년, 박영선은YFC (Youth For Christ)에서 간사로 일하다가, 1976년 3월 총회신학원에 입학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특징은 박영선이 방황시기를 끝내고 목회적 헌신의 결정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의 방황은 청년기의 자기 선택적 불안정성에서 시작되어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반면, 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대면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소명은 계속 이어지는 떨칠 수 없는 그분의 간섭에 대한 자기의 포기훈련이요, 포기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신학연구 시기와 한국교회 경험 (1976-1981)
사실 이 기간의 박영선은 신구약 성경을 조망하는 성경학을 비롯하여 교리적인 체계와 그 밖의 전문 신학수업을 위해 온 정열을 불태웠으며, 이제까지 경험하고 이해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다양한 삶의 패턴들에 대해 체계적인 정리를 마친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그가 입학한 총회신학원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그의 성경관을 비롯한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될 것이다. 총회신학원은 1901년 평양신학교로부터 시작하여 몇 차례의 한국교회의 교단분열을 거치는 동안 보수적인 신학성향을 유지했던 박형룡, 박윤선 등의 청교도적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교단에 소속된 신학교로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신학교였다. 더구나 총회신학원은 성경의 교리나 가르침을 엄격한 경건주의와 근본주의의 패턴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신학교의 분위기는 한국사회의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에 상당한 호응을 받아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박영선이 총회신학원에 입학해서 신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는 이 학교가 표방하는 보수적 성경관의 전제에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지, 경건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훈련을 받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는 보수적인 성경관의 태도로 성경 자체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절대적 기준을 강조하는 것과, 성경을 해석하여 다양하고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적용하는 데에서도 그 기준을 요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인정이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어야 된다는 강한 전제를 가진 그가 보수적인 성경관을 표방하는 총회신학원에 입학한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시기의 그는 성경을 이해할 통로로서의 신학연구에 집중하여, 신학교의 교과과정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신학조망을 훈련했다.
사실 총회신학원은 보수적인 장로교신학교였기 때문에 전통주의적 성경해석과 경건주의적 청교도주의의 신학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박영선은 성경관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를 인정하고 믿는 입장이었지만, 많은부분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전통주의와 근본주의적 성향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예컨대, 한국교회의 전통주의적 보수신학 경향이 절대적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기초 위에서 형성된 성경관일지라도,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지난 100여 년간의 한국교회는 기독교적 성숙의 과정으로서 일관된 흐름을 보였다기 보다 많은 극단적인 사회적 사건과 경험을 통해 때로는 폭발되고 단절되며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기독교 복음의 본래적 가르침과 이상을 왜곡해왔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의 한국교회의 경우, 한국의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으며 복음과 문화의 적대적 입장에서 복음을 사수하고 믿음을 지켜냈다고 한다면, 일제의 식민지배체제 아래의 상황에서는 민족복음의 전투적 입장과 북한 공산주의의 기독교탄압의 분위기 속에서 더욱 근본주의적 열심으로 기독교 복음의 생존적 싸움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성향은 한국전쟁 이후 평화시기가 도래하게 되자 그 패턴을 달리하게 되는데, 한국교회가 교회의 부흥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여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전환되어 이전 시대의 동일한 근본주의적 열심을 불태우게 된 사실은 이를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성은 한국교회와 신학에 영향을 끼쳤는데, 총회신학원의 경우도 이러한 근본주의적 태도와 경건주의적 사고의 영향권에 있었다. 이점에서 박영선이 보수적인 성경관을 표방하며 동시에 경건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강조하는 총회신학원에 입학한 사실은 마치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뛰어든 경우로서, 하나님의 계시로서 말씀인 성경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복음이해가 근본주의의 열성신학적 태도를 적절히 분석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있겠다.
따라서 박영선은 이 기간동안 목회자로서의 신학훈련을 통해 우선적으로 성경연구에 몰두하는데, 특히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과 복음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재조명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다시말해 그는 성경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성경 그 자체의 연구와 동시에 그 본문이 이해되고 해석되는 현장으로서의 맥락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연구에 집중했으며, 더 나아가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그대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믿음으로 성경을 조명하고자 노력했다. 성경본문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정황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본문의 배경에 대한 문헌학적이고 신학적인 이해를 전제로 그 본문의 해석자와 그 청중이 속한 시대정신과 이해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어야 했다. 그에게 있어 후자의 준비는 이미 소명 형성과정의 시기에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문제의식을 고취하고 있었으며, 전자에 대해서는 이 신학연구 기간의 탐구를 통해 자기 자신의 독자적 이해패턴을 갖고자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박영선은 이 기간동안 성경본문의 연구와 더불어 개혁신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종교개혁신학의 칭의의 구원론과 성화의 교회론에 대해서 역사적 이해를 위해 일관된 시각을 형성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원으로서 기독교 복음의 이해에 결정적인 출발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그는 이러한 종교개혁신학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한국교회에 전수되었는가를 주목하고, 근대 이래의 교회사와 신학사를 교리적 전수의 연관과 함께 살펴야 했다. 그가 발견한 한국교회의 모체로서 교회와 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일차적 모델은 19세기의 북미 청교도적 장로교였는데, 20세기초엽 프린스튼 신학교에서
일어난 논쟁인 독일적 자유주의와 미국의 근본주의의 갈등에 있어서 각각 전자는 이성주의적 신학으로 후자는 도덕주의적 신학으로 평가할 수 있는 미국교회와 신학의 영향이 한국교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음을 주목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한국교회의 특징은 미국교회와 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기독교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교회와 신학, 그리고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였다. 사실 미국은 한국이 1945년 해방된 이래, 그때까지 영향을 받아왔던 일본을 거절하며 그 대안으로 택한 우방국가였다. 1950년부터 일어난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은 한국에 대해 뗄래야 뗄 수 없는 혈맹국가로 발전했고, 이와 함께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미국을 한국교회와 신학의 모델로 선택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영선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신학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미국교회 너머에 있는 유럽의 교회와 신학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적절하고도 균형잡힌 합의를 만들어 내었던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근세의 이성주의적 명료함과 전통주의적 정통성이 빚어낸 갈등과 함께 개혁교회와 신학을 스콜라주의적 형태와 이신주의적 형태로 변형시켰던 17세기의 독일과 화란의 신학형태를 전제로 하여, 잉글란드의 정치구조논쟁을 둘러싸고 전개된 교회론적 논의의 부정적 결과인 청교도 운동의 영향으로 미국의 기독교회 출범은 경건주의적 운동성향에서 시작되어 종교적 자유이상과 잘 융화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형성했다. 이점에서 그는 과연 한국교회와 신학이 성경말씀의 적절한 이해와 교회사의 균형잡힌 교훈을 기초로 하여 본래적인 기독교 복음의 에이전트로서의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 답하려 했다. 이는 기독교 신학과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작업과 동시에 주류적 기독교회의 역사적 패턴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수반되었다. 따라서 박영선의 신학수업은 비록 한국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시작했을지라도, 개혁신학의 복음과 교회이해를 다양한 역사적 신학의 모델에 비춰 수행했기 때문에 그 내용의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 제한된 여러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를 감당한 결과 건강을 크게 헤치게 되었다.
1979년 2월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목사가 된 박영선은 몇몇 전통적인 분위기의 한국교회에서 말씀을 설교하며 봉사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목회적 경험은 비록 짧고 간접적이며 단절적이었지만, 그의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체질에 대한 이해를 보다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자신의 성경본문 중심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뚜렷한 목적의식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실, 이 시기부터 그의 설교는 성경을 보는 시각의 독특성이나 성경 자체에 대한 풍요로운 메시지 전달이 많은 청중들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면 줄수록 당시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그의 설교를 제도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한국문화적 차원에서의 전통적이고 경건주의적인 교회들은 그의 설교가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킨다거나, 교회 내의 권위와 질서를 위협한다고 인식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설교가 기존의 한국교회의 정서에 맞게 행해지는 패턴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젊은 부목사로서 많은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 성경을 보는 관점과 메시지 전달의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기존 교회 내의 다른 권위 그룹에 의해 강하게 견제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비록 그 스스로가 기존 한국교회의 전통적 제도의 산물이었을지라도, 그가 시도한 기독교 복음의 한 걸음 진전된 소개는 아직 한국교회의 제도적인 성향 때문에 충분히 소화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그는 이런 준비되지 않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통감하며 경험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의 박영선은 목회자로서의 훈련과 자세보다는 성경과 복음을 설교하는 설교자의 훈련과 자세가 더 확인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1982년 1월 미국 버지니아 린치버그의 리버티 신학대학원에 유학하여 기독교교육학 석사(MA)를 공부한 사실도, 그의 성경과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훈련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그의 미국유학은 신학연구의 확대라기보다 한국교회와의 연관으로서 미국교회와 신학, 그리고 미국문화에 대한 경험으로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영향사적 배후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는, 또한 기독교 복음과 현대문화적 적용의 모델로서 미국교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연구 분야였던 기독교 교육에 대해서도, 그가 이제까지 연구하고 경험한 성경적 메시지의 전달을 강화하는 도구로서 의미 있는 배움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영선의 신학연구와 한국교회에 대한 경험의 시기는 박영선의 이후 목회사역에 나타나는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의 배경이 형성된 시기로서 그의 다양한 메시지의 단편적 조각들이 발견된 시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강조와, 그 작업을 통해 확인되는 성경의 메시지의 분명한 내용, 그리고 목회자로서 그 메시지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의 소명과 책임이 인식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외치는 소리로서의 메시지와 한국교회의 반응 (1981-1984)
1982년 8월 박영선은 미국유학으로부터 조기 귀국했는데,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한국교회를 말씀으로 섬기겠다는 소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의 얼마동안 그는 제도적 교회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었다. 전통적인 한국교회가 그에게 목회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던 이 시기에 그의 말씀사역은 경기도 '아멘기도원'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의 유명한 설교가로 널리 인정받던 이동원 목사(현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의 '아멘기도원' 집회에서 초청강사로 불려간 박영선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창세기의 족장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메시지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시도해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 등에 대한 해석들은 주로 그들의 신앙의 영웅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박영선은 창세기의 본문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그 족장들의 삶을 오늘날의 일반적인 신앙인의 삶과 비교함으로써 성경의 인물들을 너무 쉽게 영웅시하는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하는데, 그 족장들의 생애를 우리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간섭하시고 역사 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그의 첫 번째 책의 제목이 된 '하나님의 열심'의 개념이 한국교회에 소개된 것이다.
아멘기도원 집회 사건 이후로 박영선은 한국교회에 급속히 알려지게 되는데, 여기저기의 영향력 있는 모임에서 그를 초청하여 그의 새로운 시각의 메시지를 듣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교회에서 목회자나 설교자로 사역하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의 영향이 지속적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82년 9월 서울 신반포동 소재의 남서울교회에 청빙을 받고 교회의 터 위에서 정기적인 설교와 목회의 기회를 경험하게 된다. 더구나 당시 남서울교회의 담임목사이던 홍정길 (현재 남서울은혜교회 담임목사)은 83년 6월부터 1년간 안식년 외유 기간동안 박영선에게 임시 담임목사와 설교자로 위촉하였는데, 이 기간이 그에게 있어 목회와 설교의 경험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가 남서울교회에서 행한 첫 번째 설교 씨리즈는 구약 사사기의 입다를 비롯한 사사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받은 사사들 역시 영웅적 인물이라는 선이해를 갖기보다 오늘날의 신자들인 우리 자신들과 같은 인물이라는 전제를 갖는 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성경적 관점이라고 역설했다. 그들 사사들은 신앙의 영웅이라기 보다 오히려 연약성이 더욱 두드러진 인물들임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도구로 소명을 주시고 이끌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세기의 족장들부터 시작되는 구약의 인물들을 장기간에 걸쳐 씨리즈로 설교했다.그는 역시 이 설교들에 대해서도 성경인물들을 이해하는 새롭고 신선한 관점으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컨셉트에 초점을 맞췄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적 모델의 인물들을 대할 때, 그들을 들어 쓰신 하나
님의 이유와 의도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신앙의 모델이 된 성경인물들의 이야기는 종종 쉽게 미화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박영선의 메시지는 성경인물의 인간적인 성공과 업적이 아니라 그들의 실패와 연약함을 균형 있게 이해하도록 함으로 사실상의 성경기록의 목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로 청중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이 시절의 박영선의 설교는 아마도 가장 날카롭고 원색적인 표현과 강하고 높은 톤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 시절에 행한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회상하며 "당시 설교할 때의 심정은 정말 비장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까지 있었다"고 했다.박영선이 남서울교회에서 임시담임목사로서 설교하던 1년 동안 약 1,500여명의 성도들은 2,400여명의 성도들로 증가했는데,그들 대부분은 서울의 강남에 소재한 이 교회의 새롭고 젊은 설교자인 박영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성도들이었다. 이 같은 변화와 함께 박영선 개인의 목회와 설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 시기의 남서울교회 사역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의 서울의 지역적 특성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사회는 새로운 사회변화와 더불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일어난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사회적 구성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교회 또한 1984년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인 전도와 선교의 열정에 취해 있었고, 신도들은 날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 역사적으로 중심부 역할을 해온 한강의 북쪽 (강북) 사대문안의 기능이 경제적 변화와 주거환경의 향상으로 인해 그 무게중심이 한강 남쪽 (강남)으로 이전하던 때였다. 이때 많은 교회들이 강남으로 이전하거나 개척을 시작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회의 변화와 관련하여 당시 강남의 지역적 특성들은 다음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비교적 교육수준들이 높은 거주자들이 정착한 곳이다. 둘째, 경제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거주지역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권위적인 생활패턴 보다는 개혁적이고 개방적이며 이해될만한 생활패턴을 선호한다. 끝으로 아직도 개발도중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교회와 관련해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남서울교회는 바로 이러한 강남지역에 소재했고, 박영선의 설교는 이 지역의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충격적인 시각의 메시지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성경본문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분석, 그리고 그 본문해석의 내용을 교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설교하는 패턴은 그의 설교의 특징이었던 바, 비록 그가 손쉽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 전체적인 과정은 매우 어려운 성경본문에 대한 분석과 해석의 제안이었기 때문에 청중들의 수준도 매우 중요한 상호작용의 요인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그의 설교에 대한 이 첫 번째 단계의 선풍적인 반응은 남서울교회라는 강남의 새롭게 부각되는 지역에 소재한 상황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의 이전 교회들은 그의 동일한 설교를 들었을 때, 교회의 권위그룹이 앞장서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반면, 이 교회에서는 그의 설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남서울교회 20년사'는 다음과 같이 박영선 설교의 특징을 기록하고 있다. "박영선 목사의 말씀의 특징은, 첫째 서구식 사고방식과 분석적인 접근방식으로 도출한 내용이 많아 핵심이 명확한 강해 설교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인도하심을 강조하였고, 셋째는 후련한 청량감과 감동을 주는 설교였다.
사실 박영선이 인식한 자신의 역할은 목회자로서라기 보다는 설교자로서의 위치였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설교를 통한 말씀 봉사에 대해 그의 관심을 쏟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이 시기의 그의 설교만큼 청중들에게 원색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구사하는 외침은 그 어디에서도 찾기가 드물 것이다. 그의 설교는 사실 도회지에서 울려 퍼지는 광야의 외지는 자의 소리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시기의 나는 설교할 때마다 마지막일 것이라는 절박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받은 하나님 말씀의 깊고도 강도높은 뜻을 어떻게든 전달해야겠다는 비장함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인식한 나의 역할이 외치는 자의 소리가 아닌가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박영선은 설교자로서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남서울교회에서 주간에 행해지던 그의 저녁강의 시간에는 남서울교회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타교회의 신자들이나 신학생들이 몰려와 그의 간결하게 절제된 주제별 강의를 들었다.
(5) 남포교회의 개척과 성장시기 (1985-1999현재).
사실 박영선은 남서울교회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목회에 대한 소명이나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는 자신의 역할을 목회자로서라기 보다 설교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설교자로서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생각은 새로운 국면의 상황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1984년 9월 남서울교회의 담임목사 홍정길 목사가 안식년으로부터 귀국하게 되면서 그의 교회개척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남서울교회 20년사'는 "홍정길 목사가 귀국했을 때는 상당수의 성도들이 박 목사의 설교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것이 박 목사의 남포교회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1984년 말, 당시 강남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개포동지역에 상가건물 지하에 장소를 구하고 1985년 1월 첫째 주에 남포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남포교회'의 '남포'라는 말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사용되던 한국 전통의 불빛인 '남포'(Lamp)와 교회발생론적으로 남서울교회에서 분가된 개포동의 교회라는 의미로 '남서울개포'의 첫 자와 마지막자를 뽑아 '남포교회'라 명명한 것이다.
남포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 박영선은 이제 광야의 외치는 자로서보다 지속적이고 균형 잡힌 목회자로서의 연속 강해 설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남포교회는 창립과 더불어 개척교회가 아닌 중형교회로 시작할 수 있었으며, 해를 거듭하여 계속 놀랄만한 교회성장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박영선의 남포교회 개척의 의미가 그 교회나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어 한국교회 전반에 대한 모종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소위 박영선 스타일이라고 일컫는 그의 성경본문의 강해와 메시지 전달방식, 그리고 목회철학 등이 전체 한국교회의 전통적 흐름에 비추어 보면 아직은 낯설지라도, 주로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오던 교인들이 남포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모여든 점이나 그들이 박영선의 목회가 지향하는 바의 새로운 안목에서의 기독교 복음의 가르침과 신앙인들의 실천적 삶의 자세에 대해 기존의 한국적 문화와 전통이 개입된 부분들을 벗고자 노력하는 점은 바로 한국교회의 체질변화를 고대하던 그룹들의 반응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남포교회에 등록한 교인들은 처음부터 주로 다양한 기존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이었고, 이들은 거의 박영선의 설교를 듣고 그의 말씀강해의 독특한 메시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남포교회에 출석하면서 첫 단계의 신앙생활을 시작했을지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미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박영선의 설교가 새로운 신자들에 대해서는 물론 오래된 신앙인들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줄만큼 특별한 시각과 내용을 담고 있었음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점에서 박영선의 남포교회개척이 갖는 의미는 한국교회에 성경본문을 중심한 설교와 이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되는 목회적 헌신이요, 그의 강해 설교와 남포교회의 성장은 아직도 많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박영선의 남포교회 목회가 갖는 의미는 한국교회에 전수되고 있는 강한 정신적 성향이라 할 수 있는 열심주의적 구원관과 완전주의적 윤리관이 성경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의해 극복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기존의 남포교회의 목회와 설교를 통해 박영선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추구해온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윤리적 성화의 훈련에 대해 기독교 복음의 존재론적 이해를 제시하는데 공헌했고, 기독교 복음의 이해를 근거로 교회 안에서 근본주의적 운동성을 추구하던 한국교회의 패턴을 신앙적 삶의 실천을 통한 성화의 강조를 강조하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박영선은 자신의 목회와 강해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100여년을 지나는 동안 전도와 다양한 신앙훈련을 통한 외형적 성장을 추구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한국교회가 간과해왔던 신앙인들의 내적인 성숙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신앙인다운 태도를 드러내며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된다고 믿었다. 이제는 기독교 복음의 헌신을 열심과 운동성으로 표현하기 보다, 일상적이고 다양한 현실에서 신앙인의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실천을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성숙한 복음에의 헌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이점에서 박영선의 의의는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조명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다음 장에서는 남포교회의 설립과 그 성장과정에 대한 역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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