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악한 비본질
샬롬^^ 거룩한 주일 잘 보내셨지요. 오늘은 교회의 악한 비본질에 대한 이론 앞에서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판 없이 발전이 없고, 반 없이 정이 없는 것처럼, 정과 반을 통해서 새로운 합의 발전을 이루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는 매우 심오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 교회에서 비켜갈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룬다는데에서 공감을 얻는 책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글로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본질"과 "형태"라는 개념을 면밀히 구별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교회의 실상(實相)이 충분히 설명되지는 못한다. 전혀 또는 별로 표면적인 찬양의 대상은 되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만 되는 그런 부정적인 면이라고 해서 거기에 교회의 역사적인 "형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적 형태에도 긍정적인 면이 얼마든지 있을 수있는 것이다. 또 긍정적인 면이라고 해서 거기에 변하면서도 영속하는 교회의 훌륭한 "본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회의 악한 "비본질"(非本質, Un-Wesen)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교회의 비본질은 교회의 본질과-물론 거기에 의존하지만-모순관계에 있다. 그것은 교회의 정당한 면이 아니라 부당한 면이며, 교회의 진정한 본지이 아니라 왜곡된 비본질이다. 그것은-곧 더 자세히 설명하려니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잘못에서 나온다. 교회의 모든 역사적 양사에는 이 비본질이 마치 그림자처럼 본질을 따라다닌다. 교회의 참 본질은 비본질 안에서 나타난다.
인간 교회의 비본질을 찾아내나고 해서 교회의 모든 어두운 면에 대한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찬양자나 교회 비판자나 이 점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의 어두운 비본질을 처음부터 고려하고 들어가야 한다....변하는 교회의 역사적 형태를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영속적 본질을 알아 낼 수 없듯이, 교회의 악한 비본질을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선한 본질을 분별할 수도 없다. 본질과 형태, 영속하는 것과 변하는 것이 그렇듯이, 선과 악, 구원과 재난, 본질과 비본질도 서로 얽혀 있어서 인간의 지력으로는 완전히 풀 수도 없다. 아무리 본질적인 것이라도 변한다. 아무리 본질적인 것이라도 비본질의 영향을 받는다. 지성소(至聖所)에서도 죄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역사성만이 아니라 바로 역사상의 교회에 대한 악의 영향도 모든 교회론의 기본 전제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교회의 비본질을 공격하는 것은 현실의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기는 하나 교회의 본질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비본래적인 것에서 본래적인 것을 찾아내고 모든 악한 비본질에서 선한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비판자의 눈만으로는-예리하든 둔하든, 정당하든 부당하든, 선이든 악이든-부족하다. 피상적인 찬양자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비판자도 교회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깊은 차원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신자의 눈으로만 볼 수가 있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38-40.>>
한스 큉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하면서도 본질은 또한 역사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p, 18) 교회의 역사 속에서만 발견되는 교회의 본질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놀라운 착상 아닌가? 교회가 역사 속에 있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어려워진다. 맡겨진 것을 이야기할 때에야 교회의 본질 중에서 악한 비본질이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한스 큉은 충분하게 고대로부터 중세 현대 근대에까지 모든 교회론의 이론들을 살피면서 '맡겨져 있음'을 주장한다.(p, 29). 그리고 한스 큉은 위의 이야기를 한 뒤 다은 내용에서 "그리스도 신자는 하느님을 믿고 또 따라서 하느님만을 믿는다. 그러면 '거룩한 가톨릭 교회를 믿는다'고도 말할 수 있는가? 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성령을 믿는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p, 41).
갑자기 우리의 머리가 멍해지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를 믿지 않는다. 교회를 믿지 않고 오직 '성령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교회를 믿는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매우 심각한 고민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요, 성도는 몸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한스 큉은 "성령을 믿는다"는 차원의 고백 외에 교회를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의 생각들을 듣고 싶다.^^
어려운 문제를 뒤로 하자. 점차로 한스 큉이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다만 여러분들의 의견이 우리의 깨달음에 가속도를 더해 줄 것이다. 우선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가정을 수용하고서 이곳에서 살피고자 하는 한스 큉의 "교회의 악한 본질"을 이야기 했으면 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서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는 있었다. 재미있는-또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문제이겠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다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스승을 팔아버린 제자는 제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교회는 악할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살피면 교회는 악할 수 있다. 나찌즘의 시대 독일의 대부분의 교회와 신학자들은 '히틀러'를 정당화 했고, 히틀러를 그리스도화 시켰다. 그리고 히틀러 만세를 불렀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들 교회에 저항했다. 이 저항의 중심에는 '에큐메니칼'을 통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가 악해짐으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던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본회퍼는 이들 독일교회를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 역사적 교회의 모습 속에서 '교회는 악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시대에 악해진 교회의 모습이 교회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다. 이 모습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교회의 모습이 변질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놀라운 것은 각 시대마다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함께 항상 비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의 형태가 따라 다녔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지 않는가? 문제는 '교회가 악한 비본질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본질적인 교회에 가까운가? 아니면 비본질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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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하기 부분에서는 '---한다'라는 표현으로 글을 전개하겠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논문 쓰던 습관으로 돌아가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첫 인사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합니다'라는 표현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들을 기다립니다. 앞으로 '한스 큉'뿐 아니라, 여러 신학자들의 사상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 각도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흘러나오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접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어떤 면에서는 '교회는 악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드렸는데, 함께 고민하면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소원하며서...감사합니다. 샬롬^^
어느 날
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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