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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샤마임 소식지 09-01호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by 지심 정경호 2009. 2. 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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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호

샤마임수도원공동체 소식

샤마임수도원 공동체는 활동하는 관상기도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바른 영성의 확립과 보급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샬롬^^

 

#01. 샤마임 찬양 소식

"~찬양과 함께"의 방에 실린 찬양 중에, 은혜로운 찬양을 소개합니다.

1)오늘 집을 나서기전

2)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3)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4)해같이 빛나리

 

#02. 샤마임 말씀의 창 / [간증] 윤맹현 장로 (핵공학 박사)

"~말씀의 창"의 방에 올라온 주목할 만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03. 감동의 동영상/김수환추기경선종

샤마임 카페에 올라온 동영상 중에 함께 나눌 동영상을 소개합니다.

 

#04. 영성이야기

샤마임과 함께 연구되고 공유되는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나누고자 합니다.

 

 

 

#05. 아름다운 시와 글

샤마임에 올라온 게시물 중에 나누고 싶은 글과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김종환낭송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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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낭송시 모음 1. 눈 오는 밤에 (김용호 시 / 김종환 낭송) 2. 별 헤는 밤 (윤동주 시 / 김종환 낭송) 3.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시 / 김종환 낭송) 4. 체 념 (김달진 시 / 김종환 낭송) 5. 행 복 (유치환 시 / 김종환 낭송) 6. 설 야 (김광균 시 / 김종환 낭송) 7.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도종환 시 / 김종환 낭송) 8. 목계 장터(신경림 시 / 김종환 낭송) 9. 그리운 바다 (맨스필드 시 / 김종환 낭송) 10. 로렐라이 (하이네 시 / 김종환 낭송) 11. 미라보 다리 (아폴리네르 시 / 김종환,유남희낭송) 12.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시 / 김종환 낭송) 13 고 엽 (프레베르 시 / 김종환 낭송)



출처 :문학이 머무는 여울목 원문보기 글쓴이 : 별이야기

 

 #06.클래식과 국악 이야기 & 성화 예술

샤마임에 함께 하고 있는 클래식과 국악 그리고 성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방입니다.

1)모짜르트//SYMPHONY NO.40 IN G MINOR, K.550 1악장

2)"모차르트/봄을 기다림"

3)모차르트 / 뒤포르 미뉴엣에 의한 9개의 변주곡

4)조용한 국악 퓨전 13곡

5)거룩한 성전

 

#07. 샤마임 토론의 방

"난상토론"에 올라온 글을 소개하고 나누는 곳입니다.

 

<긍정의 힘>은 믿음의 글인가?


얼마 전에 교회 북 까페에서 책을 구입하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학교에 출강했을 때 기획일과 조연출 일을 맡아주었던 신실한 청년으로
졸업 후에도 연극 쪽 기획 일을 하고 있어
가끔 극장으로 찾아와 만나곤 했었는데
우리 교회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
구입한 책을 보니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읽으려고 샀니?”
“아뇨. 전 읽었구요, 내용이 좋아서 아직 믿음이 없는 후배에게 선물하려구요.”

제자 아이는 <긍정의 힘>을 믿음의 글로 이해하고 있더군요.
왜 안 그렇겠어요?
책의 저자가 목사님이고 책의 부제목이 <믿는대로 된다>인데다가
많은 목사님들이 추천을 하셨으니까요.

제가 이 책에 대한 <분석>을 공개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의 책>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이 책은 두 가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책을 쓰신 분이 목사님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의 내용 안에 극히 일부분을 빼놓고는
대부분 하나님과 예수님이 없다는 점입니다.

깜짝 놀라시는 분들 많으시겠지요?
믿음 좋은 제 아내도 눈을 똥그랗게 떴으니까요.
도처에 성경말씀이요, 예수님 말씀을 인용한 것도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하나님과 예수님이 없다니?
이 사람이 지금 제 정신인가?


제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이 책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도록 하지요.
우선 이 책의 큰 제목 일곱 개를 훑어보겠습니다.
“나는 비젼을 키우는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자아상을 일군다” “나는 생각과 말의 힘을 발견 한다”

“나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는 역경을 통해 강점을 찾는다”

“베푸는 삶을 살라” “나는 언제나 행복하기를 선택했다”
누가 주인이죠? 나지요. 거기 하나님이 계신가요? 아니요!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부터 시작되어
나를 죽이고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데 있습니다.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내가 깨달아서,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희생으로,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세상을 견디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심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목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책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행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과는
다른 <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목표가 서로 다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설명할 리 없지요.
책의 본문 한 장을 넘기면 (17페이지) 하나님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최고의 순간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과 패배감 속에서 허우적댈 필요가 없다. -중략 -
이런 비좁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복, 예컨대 승진과 놀라운

성장을 기대하면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찾아온다.

하나님은 마음에 커다란 그릇을 마련한 사람에게만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부정적이거나 패배감 속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일견 맞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결심, 내가 갖는 비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그 길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 이 세상에서의 성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승진이나 시키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것을 원하시는데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 되기를, 애통하는 자 되기를,

온유한 자 되기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 되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 되기를,

화평케 하는 자 되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고,
그런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 복은 <천국이 내 것>인 복이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하신 복인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 되기를 바라신다고요?
천만에요!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은 광야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순간은
요단강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 아버지를 뵈올 때 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우리가 패배자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지요.
매 말라 죽어가는 자로 만드시지 않을 것을 나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비하면
아주 작고 부수적인, 지엽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시는 분이라면
예수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믿음이 부족해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을 맞았으며, 돌로 맞고,

수고하며, 애쓰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는’ 그 고통을 당한 것일까요?


좀 더 살펴보지요. 한 장을 더 넘겨보면 (18페이지)
또 성경을 인용한 부분이 나옵니다.
유명한 포도주와 가죽부대의 비유 말씀을 예로 들고 있군요.
“예수님은 가죽부대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비젼을 키워 주셨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마9:17).
좁은 태도로는 폭넓은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이다.
- 중략 -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라고 말씀 하신다.
변하지 않으면, 원대한 비젼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그런가요?
예수님께서 주신 이 가르침이
비젼을 가지라고, 폭 넓은 삶을 살라고, 변화 하라고,
그 정도의 의미로 말씀하신 건가요?
성경으로 돌아가 보지요. 이 말씀을 왜 하셨는지.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으리니 그 때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을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마 9: 14-17)


이것이 에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주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변화되라고,
원대한 비젼을 가지라고 가르치신 걸까요?
아니지요.
우선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요한의 제자들과
유전되어 온 율법으로 예수님을 트집 잡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로 구원해 주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선포하심이요,
묵은 <유전의 율법>으로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구속하려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래서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할 일>이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큰 뜻의 주님의 말씀을
<긍정의 힘>의 작가는 고작
<변화하라> <원대한 비젼을 가지라> 정도로

왜곡시켜 이용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분석이 필요할까요?


이 책의 내용이 나쁘다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자는데 나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불행하게도 이 책의 저자가 목사님이라는데 있습니다.
목사님은 CEO가 아닙니다! 경제학자도, 컨설팅 업자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메신저도 아닙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이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님이라면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린도 후서 12: 10)
를 가르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난주일 예배에 설교를 맡아주셨던 김도일 목사님께서
요즈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비젼>이라고 하시더군요.
왜 그럴까요?
왜 교회에서 <십자가의 고난>은 사라지고
<비젼>과 <성공>과 <리더>같은 세상의 달콤한 말들이 번지고 있을까요?
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세상 풍조를 흉내내고 따라가려 할까요?
왜 교회가 말씀을 따라가려 하지 않고
세상의 성공이나 바라보고 매달릴까요?

주님은 오늘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시며
<썩을 것을 창고에 쌓지 말고 썩지 않을 것을 쌓으라>고
말씀하고 계실 터인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AwX8/75(원문보기)
 

 

#08. 주일학교와 율동(어린이 찬송가 편)

1)결코 나는 변치 않으리

2)돈으로도 못가요

3)보라 보라 내가 문에 서서

4)복음을 심었습니다

5)싱글벙글 내 얼굴은  

 

#09. 샤마임 칼럼

이곳은 누구나 "~테마&샤마임소식지"에 글을 올리시면

이곳에 글을 실을 수 있는 장으로 마련된 곳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10대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한 부모들의 자기발견

                                                                                                                                  박종삼교수 숭실대 


 

    나는 지금 Boy's Town,소년원이라는 곳에서 약 30여명의 불우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중 17세된 승철군의 아버지는 광주에 있는데 가정부로하로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승철군을 때리면서 집 나간 엄마를 찾아오라고 하므로 그는 화가 나서 거리를 방황하다가 우리 전도사님을 만나 소년의 마을인 Boy's Town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약 한달정도 지내더니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광주시내에서 여자들의 핸드백을 날치기하는 것으로 유명한 소위 쓰리꾼으로 하루에 돈을 몇 십만원씩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왕치라는 사람에게 잡혀 돈을 버는 족족 모두 빼앗기고 소년원에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소년원을 나오기가 무섭게 문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깡패들이 또 데려가려는 것을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길을 거부하고 우리 소년의 마을에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건전할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소년이 2년만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합력하고 이번에는 대학 예비고사를 치뤘습니다. 그는 대학을 갈 것입니다. 광주 충장로에서 핸드백 날치기로 가장 유명했던 쓰리꾼이 하나님을 믿고 그 삶이 변화되어,어려운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간다는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디모데후서 3:16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말슴이 있습니다. Boy's Town에 있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보면 잘못이 원인이 그들에게 있기 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오늘날 청소년들이 나쁜가?] [왜 청소년들이 비행을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왜 불우한 청소년,비행 청소년들이 나오게끔 부모들이 만들어 놓았는가?] 에대한 문제인 [10대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한 부모들의 자기발견]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래의 4가지 사항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우리 청소년들을 사랑하자. 둘째, 우리 청소년들을 잘 알아보자. 셋째, 우리 청소년들을 통제하자. 넷째, 우리 청소년들을 지도해 주자.

    이것은 바로 디모데후서 3:16에 있는 말씀과 상통하는데,
    첫째,[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청소년 문제나 자녀들을 대할 때 나쁘다. 좋다는 것을 떠나 제일 먼저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훈과]라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려면 그들에 대해 잘 알아야만 합니다. 알지 못하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책망과]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는 통제를 해야 합니다.

    네째,[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좋은 부모가 못되었으며 왜 내 자식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며 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불평불만을 가지고 방황하는 자녀들의 목을 옭아매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마귀와 대항해서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워 하나님께로 이끌 자신이 없다면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기도하며 좀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첫째, 우리 청소년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3:13에[그런즉 믿음,소망,사랑,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청소년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들이 유치원이나 국민학교에 처음 입학을 하게되면 끔찌이도 사랑해 주십니다. 가령 [엄마,아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하면 [오,그래, 잘 다녀오너라]하시고,갔다오면 [아이구 예뻐라! 무척 춥지]하시면서 준비했던 간식을 내줍니다. 그러나 중학교,고등학교만 들어가면 [엄마,나 손시려]하면 [아이 이건 다 큰 것이, 징그럽다.저리가라]고 밀어내십니다. 부모들이 마음으로는 청소년이나 자녀들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은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고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 또는 교회 아이들이나 옆집 아이에게 [너를 보면 정말 사랑스럽구나]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내 자녀가[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난 분명히 알고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언제 청소년들을 사랑한다고 말로 이야기했고 끌어안아 주었으며 또 언제 자식들로부터 우리 엄마,아빠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냐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을 사랑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자녀들에게 자기가 난 자식을 미워하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욕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자기 자녀가 저녁 늦은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전화 한통 안걸어 오는 것도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신문이나 방송,텔레비젼에 보도되는 것중 청소년 문제만 나오면 나쁜 녀석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비행 청소년을 나쁘다고 하니까 나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그 귀한 생명, 이제 사회와 교회에 갓 들어와서 일하기 직전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가지고 매스콤에서 [비행이다]라고 하니까 한국에 있는 아들 딸들은 전부 비행 청소년같이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데도 신문과 라디오,방송에서 소수의 비행 청소년들만 자꾸 이야기하며 부모들까지도 호응을 하니까 자녀들은 우리 부모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사랑하는 것은 곧 신앙을 가지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 문제의 대부분이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려 해도 성경말씀으로 자식들을 키울지라도 부모의 사랑이 없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며 기독교는 사랑이고 크리스챤 부모들은 사랑입니다. 한번 나쁘다고 이야기 하려면 열 번, 스무 번 사랑한다고 이야기한 다음에 시정할 점을 이야기할 때 청소년들이 올바로 듣는 것입니다. 청소년은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귀한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청소년들이 유치원에 다니던 때나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만큼 사랑스럽지는 못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담배도 한번 피워보려 하고 맥주도 마시고 싶어하며 어른 흉내를 냅니다. 이런 것은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없는 애들을,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나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적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바르게 행동할 때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사랑할 수 없을만큼 밉게 행동할 때 더욱 더 사랑해 주라는 것입니다.

    둘째, 청소년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나에게 권력이 주어져서 대통령이나 보사부 장관이 된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대한민국의 부모들에게 청소년을 키울 수 있는 지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시험을 치겠습니다. 그래서 60점 미만을 맞는 부모는 그의 자녀를 데려다 60점 이상 맞은 부모에게 키우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가 아장아장 걸을 때는 어떻게 키우며, 유치원에 갈 때는 어떻게 하며 국민학교, 중학교까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나 고등학교쯤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말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느끼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귀한 생명을 키우려고 하면서 그들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알지 못하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며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더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교회 일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되어가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에는 [얘,나는 구식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니까 가르쳐 다오]하고 겸손하게 이야기하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왜 말대답이 많아, 우리 때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는데]하면서 욕을 합니다.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또 그렇게 반항하는지 모르겠으면 솔직하게 [얘,나는 네가 왜 반응하는지 모르겠으니 나한테 얘기를 좀 해다오.내가 들어서 배운 뒤 토론을 하자]라고 이야기 해야지 무조건 [입 닥치고 들어가 공부나 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에 있는 콤퓨터를 다 갖다놓고 사람처럼 만들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귀한 새명 하나를 다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기기묘묘하고 심오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지한 가운데 주먹구구식으로 자녀들을 키우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히 아시고 정확하게 아시는 것이므로 우리 인간은 겸손하게 한 가지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벌써 다섯이나 낳아서 키웠는데]하시면서 다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첫째,둘째,세째 아이가 모두 다릅니다. 이것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집 아이는 이렇게 나쁜데 당신 집 아이는 왜 그렇게 말을 잘 듣느냐고 반문하지만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청소년을 한번 살펴 봅시다. 12-13살이 되면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생리적으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치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넣는 것처럼 몸에서 호르몬이 분비되어 목소리가 쉰 것처럼 들리는 변성기가 되며 근육이 좀 더 강해지고 얼굴엔 무엇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주신 것이므로 핀잔을 해서는 안됩니다. 근육이 나오고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청소년들은 갑자기 생기는 현상 때문에 놀라서 거울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딸의 방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까 뭐라고 한마디 하고 나갑니다. 심리적으로 당황하게 되는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뵈만 하면 핀잔을 주고 부끄러움을 주니까 자연 부모와의 대화를 꺼리게 됩니다. 신체의 변화는 자꾸 생기고 생각도 변하는데 부모는 신앙적으로 어긋났다. 누가 이렇게 가르쳤냐고 압력을 넣으니까 아이는 당황하게 됩니다. 학교 선생님은 겁만 주고,부모는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고 교회 선생님도 가르쳐 주는 것 아니고 자연히 자기 또래의 친구들을 찾아 모이게 됩니다. 서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친구,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모여 문제해결을 하고자 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자꾸 하며 허세를 부립니다.

    속에 있는 자기의 진짜 생각은 말하지 않고 [얘,넌 머리가 예쁘다][옷을 멋있게 입었구나]라고 말합니다. 집에서는 나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고 학교에서도 알아주지 않지만 친구들은 자신을 알아 주는데 그중에서도 옷 입은 것을 알아 주니까 집에 가서 자꾸 옷 해달라고 조릅니다. 남자 아이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면서 다른 아이들이 단정하게 걸어 다니면 그들을 시시하게 여기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청소년 사회에서는 집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 쫓겨난 청소년들이 영웅시됩니다. 인기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들끼리 누가 더 영웅인가를 판가름합니다. 나는 이렇게 한다고 하면 저쪽에서는 요렇게 해야겠다고 합니다. 인기 있는 영웅이 되는 길이란 농도를 짙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쪽에서 담배 한번 피우면 저쪽에서는 그 정도밖에 안되느냐 여기서는 술도 먹는다는 식이기 때문에 청소년끼리 모이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집안에서 이와같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부모가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 그 당황한 것을 이해해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고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집을 나와 엉뚱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인기 있는 것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의 영웅 중 깡패대장을 따르게 됩니다. 가죽 잠바를 입고 칼도 가지고 머리모양도 이상하게 하고 다닙니다. 이런 것이 그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런데에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청소년들을 잘 알아서 지도하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특별히 크리스챤 가정에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대강 6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자신을 자기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눈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내 머리칼은 왜 이럴까?]언젠가 제가 외국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남자 배우의 웃는 모습이 어찌나 좋던지 저도 그렇게 웃었더니 친구들이 저를 보고 입이 찌그러졌다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시편 139:14-16에 보면 인간들의 특별한 모습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사람은 절대로 ㅁ나들지 않으시며 각 사람 하나 하나를 일등품으로 만드셔서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외모에 대해 불만을 갖거나 불평하는 것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온 천하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긴 모습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영역에서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기는 아직 자라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꾸 변하므로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은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대학생들까지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5:13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에 대한 문제는 자녀들과 철저히 토론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만 나가거나 성경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그 나름댜로 취급하고 구원의 문제는 별개로 하여 영생에 대한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용기를 가지고 청소년에게 사랑으로 도전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세째는 청소년들이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뚜렷한 삶의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에베소서 5:15-17에 보면 주님의 뜻 안에서 생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리]

    요즈음 10대들은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필사의 각오까지 되어 있는 목적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면 그들은 수긍을 하고 잘 듣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노파심에서 청소년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가 그들이 반항하거나 불만을 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들에게 삶의 올바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겨준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네째는 청소년들이 가족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청소년을 어른이나 어린아이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청소년을 만드셨기 때문에 청소년답게 인정해 주고 대우해 준다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정의 기본적 조화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가족과의 조화를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조화가 잘 될 때,거기에 맞추어 가정의 조화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지나치게 자식에게 간섭을 한다든가 아버지가 어떤 원칙없이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면 여기에서 가족간의 조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 문제는 부모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생활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청소년들이 성숙한 남녀교제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성공적인 우정관계를 위해서 친구를 택해 자식에게 사귀라고 했을 때 부모가 택한 친구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녀를 위해 택한 친구라는 것을 자신할 수 없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 같으면 [친구는 너희들이 택해라.그대신 나도 네 친구의 부모가 되고 친구가 될테니 나에게도 소개해다오.꼭 네 친구를 데려오너라.크리스마스 때는 우리가 안방을 내어 주고 친구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줄테니까 나가지 말아라]하고 말하겠습니다.

    우리 연구조사에 의하면 부모들이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여자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2달 전부터 돈을 마련해서 의정부 방면에 방을 얻어 쌍쌍파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친구 없이는 청소년이 자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는 자기 자식뿐 아니라 그 친구를 위해서도 부모가 되어 주겠다고 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가 교회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힘써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알게 된 친구는 숫자는 적을지 모르나 가장 좋은 친구를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는 당시는 좋을지 몰라도 곧 떠나거나 위험성이 있는 친구들이 많으므로 예수님 안에서 만난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면 이들도 잘 따를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그 자녀들의 친구를 초대해 저녁이라도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잘 차리지는 않았더라도 정성껏 대해 주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성장하고 밝게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녀교제에 있어 소위 데이트를 하고 약혼을 거쳐 결혼하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건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신앙적으로 볼 때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영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심, 하나님의 복음에 입각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약혼을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마음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것은 먼저 영혼의 결합이 있은 다음에 마음이 결합하여 완전하게 되었을 때 육체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께 살다보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서로 다른 두 영혼이 만나 한 영혼으로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어 생의 목적을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감정적으로 일치가 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같이 하고 그 다음에 다가올 기대와 감격을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준비가 된 후에야 결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청소년이 갖고있는 5가지 문제를 바로 안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게 되며 이해하게 됩니다.

    세째,청소년들을 통제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청소년들을 통제하는 것에 대해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청소년은 너무나도 꿈이 많고 그 길이 많아 다 택할 수 없으므로 부모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통제이지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아닙니다.[네가 갈 길을 마음껏 가라. 가장 좋은 길, 최선의 길을 택하라. 그것은 막지 않겠다. 단 너를 파괴하고 위험으로 인도하는 길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고 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부모가 이것을 좋지 않다고 했으니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여 부모의 말을 잘 들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부모, 청소년을 잘 알지 못하는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한다면 들어주기는 커녕 반항만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먼저 사랑하고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마땅히 자식들을 책망하고 통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시끄러워질까봐 또는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통제는 해야 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에 밝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째,우리 청소년들을 지도해 주자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하지말라고 통제만 강요할 뿐 무엇을 하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굽은 길로 가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청소년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이유를 납득이 가도록 충분히 설명한 다음에 좋은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좋지 않은 장난감을 갖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기만 해서는 안되고 대신 다른 장난감을 주어야 합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집에서 자유스럽게 놀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만드신 이유는 풀이나 동물과 같이 혼자 자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20세까지는 부모 밑에서 아름답게, 섬세하게, 강하게, 행복하게 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계획을 철저히 세우셔서 만들었기 때문에 열두살 때에는 마지막으로 테스트하기 위해서 청소년기를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때는 행동반경이 넓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청소년들을 부모에게 맡겨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모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긴 귀한 생명을 키울 때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잘 알아서 나쁜 길로 가는 것을 통제하고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어 훌륭하게 양육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인 인간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10대 청소년들을 주셨습니다.이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자랑스런 10대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며 이 나라의 장래입니다. 부모들은 그 10대들을 사랑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어야 하며 더 나아가 생각할 것은 부모가 없는 청소년들 문제입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데 부모가 없는 그 많은 청소년들에게 누가 부모가 되어 주겠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청소년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여러분은 무관심하게 외면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모가 없는 불우한 청소년과 의롭게 살아가는 청소년을 위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크리스챤 부모들은 자기 자식만을 위하고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각성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모두 하나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이들을 사랑하고 알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감하게 꾸짖어 복음의 말씀으로 인도합시다.

 http://cafe.daum.net/shamaimprayer/DYeJ/152(출처찾기)

 

#10. 말씀을 묵상합시다

요한복음 21장 15-25절<내 양을 먹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 묵상 기록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된 교훈은?

 

 

 

 

 

 

 

 

(3) 나의 결심과 기도문 적기

 

 

 

 

 

 

 

3. 묵상을 돕기 위한 설명 글

그리스도와 베드로와 대화 21:15-19

 이는 본문에는 그리스도가 조반을 먹고 나서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1) 그는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시험하시고 그에게 자기의 양떼를 돌보라는 책임을 부여하신다.    1)그리스도는 언제 베드로와 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베드로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이 그에게 어떤 불안감을 주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베드로는 그의 선생인 그리스도가 불쾌감을 품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배은망덕을 책망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한 이래로 베드로는 세 번은 아니더라도 두 번씩이나 주님을 보았다. 그러나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베드로 자신이 주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때때로 최상의 관계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아직 어떤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주님께서 그를 그 고통으로부터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화해의 표시로써 함께 식사를 하고 나서 다정한 친구처럼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었다. 베드로가 그것을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실성에 만족하셨기에, 그의 죄는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잊혀졌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에게 여전히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죄를 뉘우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고무적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2)대화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똑같은 질문이 세 차례나 반복되었고 또 그에 대해 똑같은 대답이 세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세 차례의 똑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구주에 의해 동일한 질문이 반복될수록 베드로는 더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본 복음의 기자가 그 내용을 반복하여 서술함에 따라 우리들과 그것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더욱 큰 감동을 받게 된다.   ①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는지를 물으셨다. 첫 번째의 질문은 이러했다. 요한은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주님께서는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다. 누가복음22장31절에서 '시몬아 시몬아'라고 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주님이 여기서 사용한 이름은 자기가 그에게 주었던 이름인 게바나 베드로가 아니라, 그의 본 이름인 시몬이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마태복음16장17절에서 그를 축복해 주실 때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어떤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그의 잘못이 그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야기시켰다. 즉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야, 내가 너의 사랑을 의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했다면 내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너는 나를 시인하기에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고 나서 우리의 신실성이 의심받는 것을 모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감동적인 것이다. 즉 "그 증거만 보이라. 그러면 네가 받았던 모욕은 사라질 것이며 더 이상 그에 반대되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인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참회자임을 눈물로써 고백했다. 그는 이제 한 참회 자로서 부끄럽게 주님 앞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몬아, 얼마나 많이 울었느냐"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했다. 이'사랑하느냐'라는 말에 위로를 받은 베드로는 다른 회개의 고백을 하게 되었다. 둘째, 그의 임무는 그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양을 그에게 맡기기 전에 '네가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듯이 자기의 양떼들에 관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에 그것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시고 담나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 맡기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단코 인간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역 자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사역 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통해 만나는 어려움과 낙망에도 불구하고 즐거이 전진할 수 있도록 강권할 것이다. 이 사랑만이 그들의 일을 쉽게 만들며, 그들을 그 가운데서 참으로 진지하게 만들 것이다.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네가 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너는 야고보나 요한이나 안드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그를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너는 이들이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모든 사람이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그의 헛된 자랑을 책망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느냐 하는 경쟁은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도 처음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첫째,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비교의 말을 생략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기를 그의 형제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또 그의 형제들과 비교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한다고 더 말할 수는 없더라도,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열납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세 번째 질문에서 단어를 바꾸어 사용하셨다. 처음의 질문에서 사용된 단어의 원래 적인 의미는 "너는 나에게 호의(혹은 친절함-역주)를 자기고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보다 더 강조 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나는 당신을 대단히 사랑합니다"라는 것이다. 마지막 질문에서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사용한 그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②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동일하게 그리스도에게 답변했다. ㉠베드로는 나머지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존중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더 악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음을 거듭 거듭 고백하고 있다. "주여, 그러하외다. 확실히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그는 주님의 친절함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으며,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였는데, 그는 주님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되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사랑하는 자를 모욕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앞으로 주님을 확고하게 믿겠다는 다음과 같은 약속도 된다. 즉 "주여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나는 결단코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눅 22:23). 그리고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도 변치 않았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시험하고 계시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라는 대답을 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주님께 호소한다. 그리고 세 번째에는 더욱 강조해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을 증인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사람의 마음도 안다고 확신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그에 대한 자신의 신실한 사랑도 알 것이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 위선자에게는 두려운 일이겠지만 진실한 그리스도교인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직을 모르고 있더라도 그분께서는 알고 계시는 것이다. ㉣주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근심을 하게 되었다(17절). 그 질문은 베드로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비록 용서받은 것일지라도 참회자의 슬픔을 새롭게 해주는 법이다. 또 그 질문은 자신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앞날의 잘못을 그리스도께서 예견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낳게 했다. 베드로는 "그렇다 주님께서는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분명히 알고 계시므로 나에게 이처럼 질문하는 것이다. 내가 또 다시 시험 당한다면 나는 어찌될 것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③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명령하셨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보호를 받도록 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어린양과 양들이다. 이 양떼 속에는 어린양도 있고 양도 있다. 목자들은 어린양과 양들을 모두 돌보지만 그 중에서도 어린양들을 먼저 돌보게 된다. 그리스도에게 부여받은 베드로의 임무는 양들을 먹이는 것이었다. 15절과 17절에 사용된 단어는 명백하게 "그들에게 음식을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16절에 사용된 단어는 그들에게 목자로서 해야 할 모든 일을 하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어린양과 양을 먹인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이다. "그들을 먹이라"는 것은 그들을 가르치라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그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종교적인 의식을 베풀라. 그리고 그들이 처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개별적인 방법으로 먹이되, 그들 앞에다 음식을 내놓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마음이 강퍅해서 먹지 않으려는 자들이나 심성이 연약해서 스스로 먹지 못하는 자들에 맞게 먹이라" 그런데 왜 그리스도께서는 유독히 베드로에게 이 임무를 부여 하셨을까? 그리스도가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 임무를 부여하신 것은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이제 베드로는 회개했던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이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그와 화해했다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확신을 결코 주시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확신을 결코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용서했을 때 그에게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장 귀한 보물이 맡겨졌다. 이 일은 베드로를 격려해서 그의 사도직을 근면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성급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또 목자들을 감독하는 위치를 차지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에게 양을 먹이라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만일 그가 목자들을 감독 하고자 한다면 그는 먼저 양을 먹어야 하고 더 이상 성급한 행동을 삼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임무를 맡기셨는데, 곧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죄인들을 회심케 했을 뿐만 아니라, 양떼를 기르는 자가 되어 성도들을 교화하게 하셨던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사도의 명예를 확신시킨 뒤 그가 더 훌륭한 순교자로서의 명예를 누리게 될 것으로 말하고 있다.    1)그의 순교는 어떻게 예언되었나.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①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당할 고난에 관한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엄숙하게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은 있음직한 일로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네게 말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확실한 일로서 말씀되어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고난을 미리 아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당할 모든 고난을 미리 아셨다. 베드로에게 양떼를 먹이라는 임무를 부여하신 주님께서는 그 일에 있어서 베드로로 하여금 안일과 영광을 기대케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핍박의 길로 가게 하셨다.    ②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그가 사형 집행인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고대의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가 지배하는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한다. 장엄하고 엄숙하게 처형시키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실히 믿는 사람들은 종종 이처럼 가공할만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당해야만 했던 죽음은 비록 순진한 성품을 지닌 자라도 전율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단적인 죽음이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베드로 역시 인간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쓴잔을 받지 않으시려고 친히 기도하셨던 것이다. 고통과 죽음에 대해 갖는 자연적인 반감은 양쪽 모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스러운 복종과 잘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③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베드로가 이전에 누렸던 자유와 비교하신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우리는 자유와 건장 그리고 풍요로움이 주는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곳에서는 더욱 억압과 질병과 가난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나는 행복을 누렸던가? 그러므로 이제 좋은 것을 가졌으니 또한 나쁜 것도 당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형편에 따라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즉시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다녀선 안 된다.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가 원하는 곳으로 다니면 되는 것이다.   ④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늙어서 이러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고요히 세상을 하직하려 했었을 때 그의 적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늙기까지 적들의 격노로부터 그를 보호하시고자 했다. 그 까닭은 그를 고난받을만한 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으며 또 그로 하여금 좀더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2)이 예언에 대한 설명(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모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일뿐만 아니라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 가도 각 사람에게 정해져 있다. 이 세상으로 올 때에는 하나의 길밖에 없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많은 길이 놓이게 된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될 그 길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사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참을성 있게 죽거나, 기쁜 마음으로 죽거나, 유익하게 죽는다면 그것이 바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특별한 방법이다. 순교자가 흘린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희생으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3)여기에 잇따라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로 회복된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이 최초로 베드로를 불렀을 때 사용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베드로가 당할 고난에 대해 예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내가 받았던 대로 대우받게 될 것을 기대하라, 왜냐하면 제자는 그의 스승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도로서의 일을 신실하고 근면하게 하도록 그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자기를 통하여 양치는 자의 모범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이런 가운데서 주님을 따랐으며 그것이 곧 그들에게는 영광이었다. 어느 누가 이러한 지도자를 따르기에 부끄러워하겠는가? 그후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랐고 또 그것은 그들에게 미래의 행복이 되었던 것이다. 은혜 중에 그리스도를 신실히 따르는 사람은 확실히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를 것이다.

  요한에 관한 증거 21:20-25

 1.요한에 관한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대화(20-23)  (1) 베드로가 요한에게 던진 시선(20절): 베드로는 주님을 따랐으며,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도 같이 따르는 것을 본다. (1) 요한은 어떻게 묘사되었나. 그는 직접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묘사를 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여기에 베드로의 부탁으로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있던 요한이 주를 파는 자가 누구인지 여쭈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이유는 아마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 여쭌 질문이 바로 뒤에 기록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때는 요한이 총애를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요한은 베드로가 원하는 바를 알려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가 총애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므로, 그는 사람이면 누구나 장래의 일을 알고 싶어하듯 요한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해서 요한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들이 은혜의 보좌에 있을 때,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이다. (2) 요한은 무엇을 했나. 그도 역시 예수를 따랐다. 주님이 계신 곳이면 그의 종 요한도 언제나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자신에게도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이 일에 관한 베드로의 주목: 베드로가 그를 보고(21절). ①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벗어난 책망 받을 만한 방심이다. 최적임자는 방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발견한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시기에 적절하지도 않는 관심을 쏟음으로 해서 종종 하나님과의 교제를 잘못되게 한다. ②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의 동료 제자에 관한 칭찬 받을 만한 관심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영광을 주셨다고 해서 뒤따라오는 제자를 무시할 정도로 마음이 들떠 있지 않았던 것이다.  (2) 요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1절).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첫째, 요한에 대한 관심과 친절로 즉 "여기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하실 말씀이 없겠습니까? 당신께서는 그가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이며, 어떻게 그가 영광 받아야만 하는 지를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둘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베드로의 고난에 대한 불안으로 "주여, 나는 원치 않는 곳으로 홀로 가야만 합니까? 이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을 나누어 갖지 않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셋째, 장래의 일을 알려는 호기심이나 분별없는 욕구. 그리스도께서 하신 답변을 통해 볼 때, 그의 질문에는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보다 남들에게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남의 일에 분주하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태만하기 쉽다. 즉, 겉은 멀쩡하나 속은 썩어있기 십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문보다는 사건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뒤에 따라오는 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들은 우리의 양심을 이끄는 것이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3)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첫째, 여기에는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베드로처럼 순교를 당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를 자신에게 데려갈 때까지 살 것이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고대의 역사가들은 요한이 열두 제자중 실제적으로 순교자로 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전해 준다. 그는 오래 산 뒤에 늙은 나이로 자신의 침대에서 죽었던 것이다. 순교의 면류관은 빛나고 영광스러울지라도,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그것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지 베드로의 호기심을 꾸짖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요한을 결코 죽지 않게 예정했더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네가 어떻게 죽어야만 하는지를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는 나를 따르라." 제자들은 현재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행할 것이며, 자신에 관한 것이나 남들에 관한 것이나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관해서는 호기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인 것이다. 사람이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많은 일에 열중하기 쉽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판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 밖의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여들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당신은 이런 저런 일들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흔한 질문은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쉽게 답변될 수 있다. 종이 앉고 일어섬은 그 주인의 권한에 속해 있다. 숨겨진 일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권한 밖의 일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일 중 가장 큰 일은 의무이지 사건이 아니다. 의무는 우리의 할 바이고 사건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든 의무는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요약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전심을 다해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의무를 다한다면 우리의 일이 아닌 것에 끼여들 마음이나 시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야기된 오해: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23절).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신 말씀을 오해함으로써 교회에서 쉽게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즉, 요한은 순교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 그 말씀을 교회에서 요한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결론지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것을 당리 해석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과 수단 그리고 방편과 외적인 도움들에 너무 집착하기 쉬운데 반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군을 바꾸시고 여전히 자신의 역사를 수행해 나가시기도 한다. 교회는 영원한 성령의 인도 아래 있기 때문에 불멸의 사역 자들이 교회를 꾸려 나갈 필요는 없다. 아마도 그들은 당시 요한이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오래 살았었기에 자신들의 기대는 확실히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 말의 불확실성과 그 위에 쌓은 어리석은 우리 믿음을 알아야 한다. "형제들 사이로 퍼져나간" 사도의 전승이 있는 바, 그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빨랐으며 공적이었으나 여전히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라. 인간의 경향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야 마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무지하고 침착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왔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을 고수하려는 노력에 의해 이런 오해들은 쉽게 교정된다. 요한은 여기서 주님의 바로 그 말씀을 반복함으로 형제들 사이의 말을 바로 잡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말씀 외에 더 이상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게 하라. 인간의 논쟁의 최상의 목적은 성경에 명시된 말씀들을 옳게 지키고자 함이어야 한다. 성경에 쓰인 언어는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적당한 도구가 된다. 성경 자체는 그 자체로써 모든 위험스런 오류들을 부수는 최대의 무기인 것과 같이, 성경 자체는 동일한 진리를 상이하게 표현함으로 해서 생긴 상처들을 치유하는 최대의 구원 무기인 것이다. 동일한 논리와 형이상학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동일한 성경의 용어에는 동의 할 것이며 그래서 서로 사랑하기로 마음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2. 본 복음서의 결론(24,25)  (1) 본 복음서는 필자의 결론 부로 끝나고 있다(24절). 당대를 향하여 '이 말을 증거하고' 후세대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를 기록했던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써넣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요한도 자신의 이름을 사실상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온전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졌는데 그들은 그것을 피로써 증거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알고 있는 바를 토대로 해서 그것을 기록했다. 이 역사의 필자는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그의 품에 의지했으며, 직접 설교를 듣고 기적을 목격했으며 또한 부활을 증거 했던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록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본 것을 증거 했듯이 그들이 처음에 증거한 것을 기록했다. 그것은 문서화되기에 앞서 최대의 정확성을 지닌 구두어로 널리 알려졌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굳게 지켜야만 하는 선언서로서 기록했다. 그리스도의 관한 역사가 문서화되어 다는 것은 은혜로운 예정이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각처로 전파되고 모든 세대를 통하여 지속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본 복음서는 여기까지 진술되어 온 내용의 진실성을 증언함으로써 끝맺고 있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24절). 눈으로 본 증인이며 흠없는 명성을 지녔고 또한 보다 큰 확실성을 위해 그것을 기록한 증인의 증언은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이다. "우리는 아노라"라는 말은 이러한 증언이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세상 모두가 안다는 말이다. 복음의 진리는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망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교훈으로 하여금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입증하게 하라. 그 말은 또한 여기에 진술된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그 당시 교회들의 만족을 나타낸다. 영감에 의한 기록은 사람으로부터 기록된 어떠한 증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교회의 공인에 부쳤던 것이다. 혹 그것은 본 복음서 기자가 썼던 것의 신실성에 대한 자기 자신의 확신을 가르킨다. 즉 복음서 기자 자신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전했던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 전적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주어진 생활을 말씀에 따라 세상과 다르게 살았다. 즉 주어진 생을 버리고 다른 것에 의지했던 것이다.   (3) 본 복음서는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구절로 끝맺는다(25절). 만일 그들이 자유롭게 기록했더라면, 심지어는 그 씌어졌을 책을 세상도 다 수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 복음들이 왜 더 이상 기록되지 아니했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것은 화제거리가 다 떨어졌다거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고 행하셨던 모든 것은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킬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의 기적들은 많고 많았으며 그 종류도 다양했고 동일한 기적도 종종 반복되곤 했었다. 매우 다양한 증인들 앞에서 반복하여 행해졌던 기적들은 그것들이 진정한 기적임을 증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로운 모든 기적은 이전의 기적을 더 잘 믿게 했으며, 기적들 중의 다수는 모든 보고를 논의할 여지가 없게 해 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할 때우리 앞에는 풍부한 화제거리가 있다.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절반도 안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 중 한 마디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느 복음서 기자에 의해서도 기록되어지지 않은 것이다(행 20:35). 또 그 외에도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기록된 것만도 그리스도의 교훈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으며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씌어진 것을 믿지도 활용하지도 않으려 한다면 더욱 많은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으리라, 되어진 일 모두를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것은 전대미문의 거대하고도 볼꼴 사나운 역사 기록이 되어 모든 다른 저술들을 밀어부치고 우리에게 그것들을 위한 여지를 조금도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부어대는 식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이 기록한다는 것은 세상이, 도의상, 그 기록되었음 책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명하지 못하다. "세상이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8:37에서 하신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는 말씀 속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말씀들이 그토록 많았더라면 그로 인해 다른 공간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읽는 데 시간을 소모해야 할 것이겠고, 따라서 다른 의무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게끔 되었을 것이다. 기록된 많은 부분은 간과되고, 많은 부분이 망각되며, 또 많은 부분에서 의심스런 논쟁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책들이 세상에서 이루어졌다면 그와 같은 상태는 더욱 더 심화되었을 것이다. 특히 기록된 것들이 묵상되고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었기에 현명하시게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는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우리는 기록된 책에 대하여 감사하되, 그것이 평범하고 간결하게 되었다하여 작게 평가하지 말며, 높이 되기를 사모하여 거기에서 우리의 역량이 크게 향상되고 증대되어서 기록된 것들이 과중한 짐이 되는 위험이 없도록 해야겠다. 본 복음서의 기자는 '아멘'으로 끝맺음으로써 자신의 인을 치는데, 우리도 그것이 참되고, 모든 것이 참되다는 믿음의 '아멘'으로 인을 치기로 하자. 그리고 기록된 것에 대한 만족의 '아멘'이야말로 우리를 현명하게 해서 구원케 할 수 있는'아멘'인 것이다.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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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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