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마임 영성 공동체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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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지심 정목사입니다.
1. 샤마임의 영성수련을 함께 할 연구원 혹은 수련회원을 모집합니다.^^
『 지 심 』
영성 연구회원(혹은 수련회원)은 '이단'및 사이비 단체의 분들은 들어오실 수 없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샤마임의 영성수련은 교회의 사역을 돕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임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원신청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Ib4n/124
2. 샤마임 후원회원을 모집합니다.
샤마임은 '선교사님'과 '문화선교사님', '샤마임 사역자' 분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시면 자세한 사항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회원 신청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샤마임과 함께 세워져 갈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원회원 정보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HdI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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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오솔길
[ 욥기 19:1 - 19:12 ] / 육신의 상처보다 큰 마음의 상처
[오늘의 말씀 요약]
욥은 자신을 괴롭히고 짓부수는 친구들에게 항변합니다. 그들은 열 번이나 욥을 학대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을 억울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길을 막으시고, 영광을 거두어 가시며, 사면으로 헐으십니다. 그의 희망을 뽑으시고, 원수같이 보십니다.
☞ 친구들의 학대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 하나님의 포위 공격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거두어 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HfwR/1039
[ Job 19:1 - 19:12 ] / Abandoned
Abandoned by Friends
1. Then Job replied:
2. “How long will you torment me and crush me with words?
3. Ten times now you have reproached me; shamelessly you attack me.
4. If it is true that I have gone astray, my error remains my concern alone.
5. If indeed you would exalt yourselves above me and use my humiliation against me,
6. then know that God has wronged me and drawn his net around me.
Abandoned by God
7. “Though I cry, ‘Violence!’ I get no response; though I call for help, there is no justice.
8. He has blocked my way so I cannot pass; he has shrouded my paths in darkness.
9. He has stripped me of my honor and removed the crown from my head.
10. He tears me down on every side till I am gone; he uproots my hope like a tree.
11. His anger burns against me; he counts me among his enemies.
12. His troops advance in force; they build a siege ramp against me and encamp around my tent.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IJOA/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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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나눔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
싱싱한 생선 100마리가 있는 곳에
썩은 생선 5마리를 넣겠습니까?
모두 넣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유는 썩은 것들로 인하여 싱싱한 것마저 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도 이와 같이 불의의 재물을 창고에 들이면
자기의 창고에 있는 의로운 재물도
다 불의 하게 될까 하여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람처럼 물질관이 뚜렷해야 합니다.
-김종석 목사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서-
http://cafe.daum.net/shamaimprayer/ArJB/1700
좋은글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ArJB/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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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로고스 신학회에 대한 소식
이번 주 신학과 나눔의 방에 올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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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김성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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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전체 내용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IHMQ/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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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샤마임 영성 공동체의 후원 선교사 소식
필리핀 정구진 선교사님 사역 소개
샬롬^^
샤마임 지심 정목사입니다.
어제 정구진 선교사님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저희 샤마임 영성 공동체 카페에 '선교사님'의 방을 마련해서
기도로 후원해 드리려는 제안을 받아 주셔서, 이곳을 통해서
앞으로 정구진 선교사님의 사역을 소개하고, '기도'로 후원하는
일들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선교사님의 소식이 좀 더 세밀하게 올라오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선교사님의 사역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서 많은 분들의 기도동역, 물질의 후원,
비전트립(단기선교)과 의료선교를 통한 후원을 부탁 드립니다.
현재 정구진 선교사님(목사)께서는 필리핀의 마닐라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교회와 지역을 선교하고 계십니다.
♣ 정구진 선교사님 사역지.
지역 : 필리핀 마닐라
섬기시는 교회
1. 메이슐라오 교회(불라칸)
2. 산 라파엘 교회(불라칸)
3. 산호세 교회(안티폴로)
4. 카누마이 교회(리잘)
5. 마닐라오정 교회
기타
기타사역
도시빈민사역
목회자 양성 사역
기타
* 정구진 선교사님 후원 계좌 및 메일 연락처
후원계좌 :
국민은행 47490104046552 정구진
메일 연락처
ckj7078@hanmail.net" target=_blank>ckj7078@hanmail.net
(기도하시며 후원하시고자 하시는 분들께서는 메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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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가나다라'를 클릭하시면 자료의 첫 글자에 속한 내용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사 아 자 차 카
성경에서 추려 본 삶의 지침 40가지
1. 하나님께 드릴 마음을 세상에 나누어 주지 마십시오(요일 2:15).
6. 시간의 가치를 잘 알아 소중히 여기고, 한 시도 게으름으로 허비하지 마십시오(엡 5:16).
7. 날마다 영원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십시오(마 25:46).
8. 당신 삶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평생 잊지 마십시오(빌 2:12).
9. 합리적인 영혼의 생각을 따라 살되, 몸이 합리적인 영혼의 생각에 굴복하게 하십시오(고전 9:27).
10. 죄에 대한 회개와 경건한 슬픔을 견지하는 가운데 살고, 또 그렇게 죽기를 연구하십시오(마 5:4).
11. 거룩해지기를 힘쓰고 의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의를 대신하지 않도록 하십시오(롬 10:3).
12. 모든 경우에 그리스도를 당신의 보증으로 삼되, 곤고할 때마다 그 분께로 달려가 피하십시오(시119:122).
13.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기대하는 만큼,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 애쓰십시오(고후 5:15).
14. 그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리스도께 꼭 붙어서 거룩한 길을 떠나지 마십시오(행 11:23; 딤후 3:12).
15. 사람들의 인정보다도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십시오(고후 10:18).
16.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보증되시는 그리스도를 감사함으로 깊이 그리고 자주 묵상하십시오(요일 3:1, 16)
17.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에 대해 말하기를 기뻐하되, 특별히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서 그리하십시오(눅 9:31).
18. 당신이 그리스도와 친근히 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제기되는 반대들은 당신 영혼을 파괴하기 위한 원수의 제안으로 여기십시오(마 16:23; 애 3:25).
19.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높이게 하는 위대한 복음의 교훈들을 부지런히 연구하십시오(마 16:24; 고전 1:31).
2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싸움을 위해 필요한 모든 능력을 그리스도로부터 얻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힘써 행하십시오(사 45:24; 골 3:17).
21.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항상 주님을 당신 앞에 모시고 그리하십시오(시16:8; 25:25).
22.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고전 10:31).
23.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내어 은밀히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하십시오 (살전 5:17).
24. 은밀히 행하는 신앙의 의무뿐 아니라, 가정에서 해야 할 신앙의 의무를 소흘히 하지 마십시오(수 24:15; 삼하 6:20).
25.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과 함께 마무리하십시오(시 4:8; 시 5:3).
26. 한 날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매일 그 날이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잠 27:1).
27. 순례자처럼 이 세상을 지나가되, 어느 때라도 짐을 꾸려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항상 세상을 느슨하게 쥐고 살아가십시오(벧전 1:17; 고전 7:29-31).
28. 세례와 성찬 때 드린 맹약을 항상 생생히 기억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십시오(시 56:12-13).
29.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의 영광을 높이는 데 쓰도록 주신 은사들을 증진하십시오(눅 19:13).
30. 모든 신자들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십시오(시 116:8, 12).
31.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구별하셨기 때문에 당신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십시오(마 5:47).
32.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경건의 모양에 만족하지 말고,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나는 것으로 자긍하지 마십시오(딛 1:16).
33. 당신 입술의 말을 항상 주의하십시오(시 141:3).
34. 모든 상황에서 기쁨을 잃지 말고 자족하십시오(빌 4:11).
35.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과 두 번째 돌 판을 분리하지 말고 항상 이 둘을 함께 생각하고 지키십시오(마 22:37).
36. 하나님과 그 분의 길을 떠나 뒤로 물러나고 배교할까 항상 경계하십시오(히 10:38-39).
37. 모든 죄를 깨어 경계하되, 특별히 당신이 애착을 갖거나 쉽게 무너지는 죄에 대하여 더욱 그리하십시오(시 18:23; 히 12:1).
38.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그 나라를 확장케 하는 일에 힘써 관심을 가지십시오마 6:10; 시 72:19).
39. 삶이 주는 그 어떤 것에도 위로를 느낄 수 없는 중병과 죽음의 침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준비하십시오(딤전 6:19).
40. 주님과 함께 할 영원한 성찬을 고대하고 바라십시오(빌 1:23; 계 19:9).
천사론(天使論:ANGELOLOGY)
신구약성경의 "천사"라는 낱말 자체는 "사자(使者)"를 의미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지으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이나 사단을 섬기고 있는 영적인 존재를 일컫는 데 특별히 사용됩니다.
천사의 기원
천사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들은 어떤 존재들일까요? 천사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천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만물이 그로(하나님의 말씀)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요한복음1: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 더 밝히 말씀하기를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1:16)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모든 천사들을 지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 때에 천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욥38:7).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하나님께서 처음 천사들을 지으신 후로 다시 더 지으신 적이 없으며, 천사들은 사람처럼 자손을 낳지도 않습니다(막12:25). 천사들은 하나씩 개별적인 존재로 지음받았으며 모든 천사들이 다 한 번에 지음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루시퍼가 타락할 때까지 모든 천사들은 최소한 그 거룩함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비슷했습니다. 루시퍼가 타락했을 때 많은 천사들이 그의 반역에 가담했지만, 대부분의 수많은 천사들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후자를 가리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이라고 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
루시퍼를 따르려는 유혹을 이겨낸 천사들은 어떤 천사들일까요? 이 점에 대해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만이 천사라는 존재가 무엇이며, 이들은 또 무엇을 하는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을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들"(히1:17)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선한 천사들은 "거룩하다"고 불리고 있습니다(막8:38). 천사는 인간과 같은 물리적인 신체가 없으며 보통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습니다(눅24:39). 그러나 어떤 때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창19:1,5, 히13:2). 천사는 사람보다 "권세나 능력이 더 뛰어난 존재"입니다. 지위상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 받았습니다(시8:5). 히브리서 2:9을 볼 때 천사들은 불멸하는 것으로, 즉 천사는 사람처럼 죽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으로 천사들은 저마다 인격을 지닌 영적인 존재며,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죄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천사는 신구약을 통틀어 수백 번이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천사를 지칭하는 낱말에는 여러 가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천사장 또는 대천사는 미가엘이라 부릅니다(단10:21, 유9). 그가 맡은 일은 특별히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성경에 이름이 밝혀진 유일한 천사로 가브리엘이 있습니다(단8:16, 눅1:19,26). 스랍(seraphim), 즉 "불타는 것들"이란 말은 이사야서 6장에만 있으며 여기서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지키는 자들로 나옵니다. 그룹(cherubim)은 창3:24에서 최초로 나오고 있으며 이들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일은 특별히 하나님의 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룹의 형상들은 성막에서(출25:18), 솔로몬의 성전에서(왕상6:23), 또 에스겔 성전에서(겔41:18) 볼 수 있습니다. 스랍이나 그룹 모두 구체적으로 천사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천사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흠정역에서는 "주(LORD)의 천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역본에서 대문자로 된 "LORD"는 다 하나님, 여호와, 또는 야웨를 나타냄}라는 어구를 보게 됩니다. 이 어구가 나타나는 일부 구절에서는 문제의 천사나 "사자"가 하나님인 것이 분명합니다(창16:11,13, 출3:2,4 등). 해당 구절들을 모두 면밀히 상고해보면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 이전에 "현현(顯現)"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곧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던 것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계시로서(요1:18), 삼위의 제2위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분이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이 기쁨으로 종의 형체를 입은 때가, 그분이 "여호와의 사자"로 일하기 위해 기쁨으로 성육신하시기 전이었다는 것은 놀라울 뿐입니다.
선한 천사들은, 루시퍼가 자기를 따르라고 한 요청을 물리침으로써 그 거룩함이 확고해졌으며 지금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종이 되어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천사들도 지성이 있으며(삼하14:20, 벧전1:12과 출25:22 비교), 또 감성(막8:38, 눅15:10)과 의지가 있습니다(사14:13,14). 이러한 특성들과 능력(시103:20), 그리고 엄청난 수효로 인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사역했습니다. 천지창조 때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욥38:4-7, 요1:3).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선구자와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눅1:17, 눅1:30-38) 예언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셨음을 목자들에게 알렸습니다(눅2:10-12). 또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천사들이 수종들었으며(막1:13, 마4:11),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힘을 돋우어드렸고(눅22:43), 그분을 보호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마26:53). 부활하셨을 때 이들이 돌을 굴려 목격자들로 하여금 빈 무덤에 들어가게 해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마28:2-4). 이들은 부활의 증거를 지켰고(요20:12,13),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에게 부활을 알려 주었습니다(눅24:4-7). 사도행전1:10,11에서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처럼 다시 오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지금, 선한 천사들은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벧전1:12, 눅15:10).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마13:39, 41, 42, 49, 50, 살후1:7-10 등).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예들은 계시록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는 일 외에도 천사들은 또 사람들과 민족을 섬깁니다. 미가엘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이며(단12:1), 주님의 재림시 그 민족을 다시 모으게 될 것입니다(마24:31). 구약은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한 예들로 가득합니다. 다니엘서는 천사의 활동, 특히 이스라엘 나라와 관계하여 행한 흥미있는 사실들이 나오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엔 천사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계시하고, 이들을 구해주고, 인도하는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행1:9-11, 5:19,20, 8:26-29, 10:3-6, 12:7-10). 히브리서1:14에 따르자면 오늘날 천사들은 구원얻은 이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영들입니다. 이들은 지역교회 안에서 경건한 질서가 지켜지기를 바라며(고전11:10, 딤전5:21), 또한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18:10).
거룩한 천사들이 하는 중요한 일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천사들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겠고 또 이들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을 도에 지나칠 정도로 높여 숭배한다거나(골2:18), 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경박한 농담을 일삼는다거나 불신하는 태도를 가진다든지 하는 것도 성경을 아는 신자가 취할 태도는 아닙니다.
가나에 대한 오해
성경에는 1300여개의 지명이 나온다. 그런데 ‘동명이지’(同名異地·이름은 갖지만 다른 장소)가 많기 때문에 헷갈리곤 한다. 사사기 12장 10절과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언급된 베들레헴이 그렇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갈릴리의 가나(요 2:1∼11),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 사이의 경계선이었던 가나 시내(수 16:8, 17:9), 아셀 지파의 성읍이었던 가나(수 19:28)가 바로 그것. 제롬은 예수님의 첫 기적과 공생애를 시작한 곳은 나사렛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고 덧붙였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대항한 첫 번째 유대 항쟁 기간 중 갈릴리 가나에서 머물렀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갈릴리 기적도 가나에서 이뤄졌다. 예수님은 가나에 계셨을 때 왕의 신하가 찾아와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아파 죽어가고 있으니 함께 가서 고쳐 달라고 간청하자 말씀으로 치유하셨다(요 4:46∼54). 요한복음 21장 2절은 나다니엘을 갈릴리 가나 사람으로 표현했다. 나다니엘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돌로매와 동일인이다. 나다니엘의 고향인 가나는 앨 밧두흐라는 비옥한 평야의 구릉지에 위치한 부자 동네였다. 가나 남쪽 13㎞ 떨어진 나사렛은 해발 400m의 산 위에 위치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심지어 세계적인 오보가 나오기도 한다. 2006년 7월 30일 예수님이 첫 기적을 행하셨던 가나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참극이 일어났다고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한 적이 있다. “…레바논 가나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처참한 학살이 이뤄진 가나는 예수가 첫 기적을 일으킨 장소라는 점에서 더욱 세계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996년에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100여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레바논의 가나는 아셀 지파의 성읍이 있었던 곳이다. 가나 혼인잔치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다.
성경에는 세 곳의 ‘가나’가 나온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라고 강조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Jerome)은 여호수아 19장에 나오는 아셀 지파의 가나, 즉 두로의 남동쪽 10㎞에 위치한 레바논의 가나마을과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갈릴리 가나를 명백하게 구별했다.
요한복음은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기록하며 가나를 언급한다.
갈릴리 가나 마을 중심부엔 프랜시스칸수도회에서 세운 첫 기적 기념교회(혼인잔치교회·사진)가 있다.
성경 지명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우왕좌왕하게 된다.
위 글 전체 보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AlF0/439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육신의 비밀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신비하고도 기적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는 오늘날보다 더 철저한 '약혼'제도가 있었습니다. 결혼하여서 동거를 시작하기 전에 1년이라는 약혼의 기간을 지내는 것인데, 이 기간은 '성적 결합'을 허용하지 않는 거룩한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약혼을 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이 두 사람이 '부부'임을 의미합니다. 부부이면서 '성적 결합'이 허용되지 않는 정결한 시기에, 성령께서 마리아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의 몸 속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아들을 인간의 육체를 입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어머니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아버지는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고 동시에 인간이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완전한 신이 이 땅에 오셨고, 동시에 인가 어머니를 통해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성육신의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더 살피게 되면, 예수님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심은,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시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동시에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 준비를 통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지닌 죄의 본성을 물려받지 않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성육신의 비밀, 즉 죄와 사망의 해결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리고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의 신앙고백은 바로 신앙인들의 마음의 고백이요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럴때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어느 날 새벽에
지심 정경호 목사.
관상과 성숙 19-성안토니오
# 성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보는 영적 성숙의 과정
영적 성숙은 기도로부터 시작된다. 영적 성숙은 참된 기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 찾아오는
첫 번째 문제가 바로 죄의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
기도의 여정(성숙의 단계)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으로 기도의 여정의 부분에서의 죄의 파급되는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죄의 문제는 기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이성’의 문제를 건드리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죄를 지어
타락할 때에도 마음만큼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서
사고의 능력, 즉 이성의 타락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기도의 장애를 가져오는 것은 타락한 이성임을 생각할 때 루터의 이성에
대한 이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죄를 지은 이후에도 이성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것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성은 “마귀의 능력 아래 매여 있기”
때문에 타락한 만물이 받아야 할 저주를 면할 수는 없다. 이성은 하나님의
지식의 “능력”과 “복음”을 깨달을 때에만 육을 버리고 영을, 일을 버리고
신앙을, 율법을 버리고 복음을 택하게 된다.
이성은 분명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과 복음의
깨달음이 없는 이성은 영적 성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기도의 여정에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현대의 시대는 이러한 이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성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성의 사람들을 향하여
부르심의 초청을 하신다. 이성이 타락함으로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는
불행한 영혼들에게 초청하시는 부르심의 메시지는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고통 중 하나는 외로움으로써, 이 외로움의
고통은 현대사회에 자살의 원인, 알코올 중독과 마약 복용, 그리고 다양한
질병들, 심지어 교통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외로움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로움은 단지 고통의 원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은 타락한 이성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부르심의 초청이다. 물론 이성을 버리라는 것은 이성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타락한 이성이 회복된 이성으로 치유되어서 올바른 판단을 갖게 하는 부르심인 것이다.*** 이렇듯이
외로움은 기도의 세계로 초청하는 하나의 음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이 세상의 다른 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로움은 이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즉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의심으로 인해 더욱더
커져 가게 된다. ‘외로움’이라는 부르심의 싸인을 받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부르심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것은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책들과
육체적인 질병을 통해서 고생함과,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고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청하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이성을 통하여 해결하려하지만
그것이 헛수고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통한 기도의 부르심에 어떤
응답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서 진정한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을 통해서 내면으로 가는 움직임이 있기
시작할 때 진정한 영적인 삶, 즉 영적 성숙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여정의
시작과 함께 영적인 민감성이 발달되고 이 민감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의
해방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도를 통한 영적 여정의 단계를 살펴보고자 할 때 가장 적절한 예로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중심으로 영적 성숙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살펴봄은 영적 성숙과 관상과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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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Tillich는 인간의 이성이 본질 상태에서 실존의 상태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타락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성의 타락은 이성으로 하여금 구원을 요청하게 하는데 구원은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계시를 틸리히는 ‘궁극적 계시’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식하는 이성을 ‘존재론적 이성’과 ‘기술적 이성’으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있다. 존재론적 이성은 logos의 이성이고 기술적 이성은 추론(reasoning)적 능력인데,
현대는 logos가 없는 기술적 이성이 발달된 시기로서, 현대의 이성을 틸리히는 인간의 본질과 이것을 결정하는
진리의 상실된 이성의 시대라 평가하면서 추론(reasoning)적 이성으로 너무 축소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존재론적 이성 안에 기술적 이성이 포함될 것을 주장하면서, 로고스의 이성은 주관적 이성,
즉 ‘자아가 파악되고 형성되는(grasped-and-shaping-self) 로고스 구조’와 객관적 이성,
즉 ‘세계가 파악되고 형성되는(grasped-and-shaping-world) 로고스 구조’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틸리히의 이성의 이해는 플라톤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 이성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은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고 명확히 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을 ‘이성의 깊이’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이성의 본질적 특징으로서, 인식적인 측면에서는 ‘진리 자체’를, 심미적 영역에서는 ‘사랑 자체’를,
법적 영역에서는 ‘의 자체’를, 공동체 영역에서는 ‘사랑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어떻게 타락한 이성이 본질적 이성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이다. 틸리히는 본질적 이성은 완전히
상실되거나 존재의 깊이로부터 완전히 결여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인간 이성이 유한하기에
무한한 근거를 파악하는 것에 무력함은 있지만, 이러한 무력함을 인식할 때 인간은 유한 속에 현존하는
무한함을 깨닫게 되며, 이것은 쿠자누스가 말한 ‘반대의 일치(coincidence of the opposite)'라고 말한다.
이런 무력함을 인식한 이성은 ’계시‘를 갈망하는데, 틸리히는 계시를 ’인간 지식에 대한 존재의 근거의 현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으로, 유한과 무한 사이의 유비(analogia entis)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식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 알려지는 지식의 과정 속에서 계시의 세 가지 표식이 있게 되는데,
첫째, 신비(mystery), 둘째, 황홀(ecstasy), 셋째 이적(miracle)이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서 타락한 이성은 계시에 붙잡히게 되고, 이것을 합일(일치)이라고 하며, 이 일치를 통해 이성은 회복된다.
본 소고에서는 이러한 계시의 깨달음을 일치로, 그리고 계시의 붙잡힘을 통해서 이성이 회복되는 과정 자체를 관상으로 보며,
그리므로 관상의 과정은 이성의 회복을 통한 영적 성숙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지심-
기도 응답받는 7단계 -케네스 해긴(Kenneth E. Hagin)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해도 응답하고 않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에 달려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반드시 응답을 하시지만, 된다, 안된다, 기다려등의 세가지로 응답하시는가? 새벽마다 시간을 바치고 금식을 하고 기도원을 찾아다니고 하지만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는가? 아니면 내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 나도 알 수 없으므로 응답을 받으면 하나님 뜻이고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사십일금식기도나 철야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도 않은 기도를 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심을 해 본적이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속시원히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해답은 하나님께서 이미 해답집, 곧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다음은 그것에 관하여 7단계로 분류하여 써놓은 케네쓰 헤긴 목사님의 책 "응답 받는 기도의 7단계"를 참조하여 요약한 내용이다.
1단계: 당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기도할 내용을 분명하게 결정하라
야고보서 1장 6-8절에 보면 두마음을 품은 자는 바다의 파도와 같아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므로 응답을 받을 것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식당에 가서 냉면과 비빔밥을 놓고 한시간 내내 망설이는 사이에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 점심을 굶고 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자기가 구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결정해야한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십시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적당히 골라서 주실 수가 없다. 백화점에 가서 돈 십만원을 내며 점원에게 "그저 알아서 주십시요"라고 하면 돈을 받은 점원이 당신을 어떻게 보겠는가?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기 전에 무엇을 하나님께 구할 것인지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확정해야하며 한번 정한 것에 대하여 두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2단계: 구하는 바를 결정하였으면 그것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읽고 묵상하고 거기 씌여 있는 것을 모두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이 눈에나 귀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삶에서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그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인정해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기도이다. 이것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구하는 기도이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할 수가 있다. 즉,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로마서 10:17)
3단계: 반드시 구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그 필요를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8)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면 구해야 한다. 그리고 구하면 된다.
4단계: 구한 것은 받은 줄 믿으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2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미 응답을 받은 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기도하고나서 응답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마치 받은 것 처럼 믿으라는 말인가? 성경은 히브리서 11장 3절에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곧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을 주신줄 믿으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3장 4절에 어떤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참되며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5단계: 의심을 떨쳐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응답에 마음을 두고 응답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내어 쫓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그 마음을 복종시키고 의심을 주는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에게서 달아난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야고보서 4:7) 또한 기도에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에 위반되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고린도 후서 10:5) 알고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것을 구하고 응답을 받기까지는 끊임없는 영적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의심이 틈타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경계하여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이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좋은 것들을 생각하여야 한다.(빌립보서 4:8) 그리하면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에게 구하는 것을 주신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6:23)
6단계: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묵상하라.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에 건강이 됨이니라"(잠언 4:20-22)
우리가 기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그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읽고 듣고 묵상하고 입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그리고 기도가 이루어진 결과를 마음속에 상상해보라
7단계: 하나님을 찬양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 기도할 때에 마음의 염려를 버리고 응답 주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일단 구한 것을 반복해서 구하지 말아야한다. 반복해서 구하는 것은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한 것을 의심하는 것은 기도를 무효로 만든다. 믿음으로 구하고 믿음의 생각을 하며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하신 것 처럼 감사하고 찬양하라. 그리하면 기도의 응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본 주제는 월간 Church Growth(교회성장) 별책 부록, "설교뱅크"(2010년 1월호부터)에 연재될 것을 회원들을 위하여 원본을 미리 올려 놓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예수님과 바울”
-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라!(I) -
김재진 교수(전 계명대 교수, 현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겸임교수)
IV. 히브리 유목민의 삶에서 창조기사를 읽어라
- 유목민의 생명여건으로서의 ‘물과 땅’ -
히브리 유목민의 생명 여건으로서의 ‘물’
히브리인의 최초 신앙고백인 신명기 26장 5절은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 ” 라는 말로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인 야곱도 목축업이 주업主業인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창 46:33-34)라고 권면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은 유리하는 유목민遊牧民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 역시 ‘이드로’의 양을 치는 목자였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 .”(출 3:1) 심지어는 ‘아벨Abel’도 목자였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베를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Cain은 농사하는 자여더라.”(창 4:2)
그런데 유목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축들에게 먹일 ‘물’과 ‘풀’이다. 광야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물’과 ‘풀’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축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간혹 ‘목자’들 사이에 ‘물과 풀’ 때문에 다툼이 있곤 하였다. 이점을 우리는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의 목자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7-8) 그래서 아브람과 롯은 서로 헤어지기로 합의하였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그래서 롯이 택한 요르단 지역은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창 13:10)
이렇듯 유목민들 사이에는 ‘물’을 구할 수 있는 ‘우물’ 때문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6:20-22) 그래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도 아비멜렉을 책망하였다.(창 21:25) 따라서 히브리 유목민에게 있어서 ‘우물’은 재산이므로 사고, 팔기도 하였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창 21:30) 이렇듯 ‘우물’은 한 개인의 소유가 되어, ‘우물’의 소유주는 ‘물을 깃고’ 다시 ‘우물’의 어구를 막아두었다.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창 29:2-3)
반면에 ‘우물’을 메우는 것은,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는 사람들의 생업을 망하게 하는 것이요,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람(=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창 26:13-15) 이러한 점에서 ‘물’은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는 ‘생명’ 그 자체였다. 첫째는 유목민의 양과 소떼들이 물을 먹어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으며, 둘째는 유목민 자신들이 ‘물’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승에 의하면, 인간들에게 ‘물’, 곧 ‘생수’를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다. 우선 이점을 우리는 - 연대기적 성경증언 순서에 따르면 - ‘하갈’의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 21:15-17a, 19)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떠나온 이후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에, 그들에게는 마실 물이 없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고 원망하였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출 17:5)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내(= 여호와 하나님)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 17:6)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다.)”(민 20:11) 이렇게 바위에서 물이 나옴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목축들은 갈증으로 인한 사망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出 애굽하여 ‘마라’에 이르렀을 때 -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 모세로 하여금 ‘한 나무를 꺾어 그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다.(출 15:23)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생수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히브리 유목민의 소망인 ‘땅’
앞 절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은 ‘유리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주 ‘목자’로 표징 되었다. 목자는 풍성한 ‘목초牧草’가 있는 곳으로 자기 양떼를 인도하여 자기 양 떼들이 배불리 먹도록 한다. 그러던 중 ‘목초’가 빈약해져서 염소와 양떼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장막을 거두어 이동한다. 이것이 유목민의 삶이다. 그래서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양 떼를 치다가, 목초가 많은 곳을 찾아 호렙 산까지 이르게 되었다.(참조 출 3:1)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도 ‘목초’가 풍성한 곳을 찾아 다녔다.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창 37:17) 그래서 히브리 유목민들에게는 자신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땅’이 없었다. 따라서 역으로 매번 풍성한 목초지를 찾아 유리 방랑하는 유목민 히브리인들에게는 한곳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는 ‘땅’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일생一生 가운데 가장 큰 소망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인들의 조상 아브람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약속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가장 크고 영원한 ‘복福’이었다. 그래서 부르게만Walter Bruggemann은 자신의 책, 땅 The Land에서 ‘땅에 대한 약속’을 이스라엘 역사의 내적 원리로 전개하고 있다. 장일선도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중요한 사건 - 가나안 정복, 왕국 출현, 바벨론 포로 이송移送 - 등은 모두 땅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본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점을 우리는 아브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러 거기서 거주할 때에, 어느 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약속해 주신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은 한편으로는, 유목민 히브리인들의 ‘영원한 소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히브리 유목민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원한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의 ‘내용적 원리material principle’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히브리 유목민의 조상 아브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조에 이르는 긴 이스라엘 역사의 내적 원리가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폰 라드von Rad는 ‘땅에 대한 약속과 성취’에 준하여, 가나안 정복이 ‘여호수아’서에서 성취되는 것을 고려하여 ‘오경Pentateuch’을 ‘육경Hexateuch’으로 확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땅에 대한 약속’은 동시에 히브리 유목민의 ‘목자牧者’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다. 따라서 ‘땅에 대한 약속’은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히브리 유목민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다시금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6-8) 그리고 끝내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 유목민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가나안)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 11:23)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땅’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히브리 유목민들은 생각하였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할 때는 언제든지 그 땅을 다시 빼앗길 수도 있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이스라엘 족속의 ‘계약파기’로 인하여 ‘가나안 땅’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빼앗길 것을 예언하였다.(참조 렘 20:4-6) 이러한 근거에서 히브리 유목민 전통에 의하면, ‘땅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다.’(참조 렘 2:7; 16:18) 따라서 폰 발토우von Waldow는 ‘토지개념’은 ‘계약사상’과 더불어 구약신약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 신앙사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조상들이 돈을 주고 산 것으로 주장하지만, 그것은 구약성경의 증언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성취를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땅을 ‘개인 소유’로 말하지 않고, ‘유(기)업הלח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폰 라드도 ‘땅צרא’ 보다는 ‘유(기)업’이란 말이 신학적으로 적합하다고 말한다.
생명의 여건으로서의 ‘물과 땅’
앞의 두 개의 절에서 우리는 히브리 유목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물과 땅’은 그들 자신의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생명여건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러한 ‘전 이해Vorverständnis’를 가지고 ‘창조기사’를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상의 앞에서 살펴본 ‘히브리 유목민들’의 일상 삶을 이해하지 않고, ‘창조기사’를 히브리인들의 삶의 정황과 독립된 것으로 읽으면, 간혹 창조기사를 ‘진화론적’으로 혹은 ‘자연발생학적’으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창조기사’는 ‘우주발생론’이나 ‘자연발생학’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창조기사’는 - 어디까지나 히브리 유목민들이 삶의 정황에서부터 직면하게 된 - ‘생명여건’, 곧 ‘물과 땅을 누가 만들었느냐?’를 증언하고자 하는데 그 초점이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여건’의 창조주를 증언하는데 그 초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필자의 2010년 2월호(“누가 자식이 떡을 달라 하면”)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창조기사는 ‘생명창조’에 대한 증언이지, 헬라적 ‘우주발생론’이나, 자연과학적 ‘진화론’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의 인지구조에 의하면, ‘물과 땅’의 창조는 “생명체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생명의 여건”에 관한 증언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생명창조’를 이야기하고 있지, 헬라 철학적 ‘자연기원론이나 우주발생론’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오히려 삶의 여건이 되는 ‘물과 땅’을 누가 만들었는지 증언하여, 그 분을 통하여 자신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물과 땅’이 왜 생명체의 ‘생명여건’인가?
‘창조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의 두 번째 ‘생명여건’으로 ‘물’을 만드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6-7) 물은 모든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물이 없으면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생명체는 물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생성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지 않으셨을 때, 땅은 황폐하고 생명체는 살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 이전의 상태를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 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다)”(창 2:5)고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보고는 물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있게 됨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창 1:20)하는 생명력이며 활력소이다. 우리 인간도 70%가 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물이 없으면, 물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죽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사막에서 목이 타 죽어갈 때에, 샘을 발견하게 하여 그들의 생명을 소생시키신다(창 21:15-19).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 광야에서 목이 말라죽게 되었을 때에, 모세를 통하여 ‘므리바’ 반석에서 물을 샘솟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사망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신다.(출 17:1-7).
이렇듯 ‘물’은 생명체가 생존해 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조건이다. 식물도 ‘물’이 없으면, 태양 에너지Energy 만으로는 탄소동화 작용을 못한다. 식물이 서식하기 위해서는 1차 에너지로 태양열이 필요하지만, 물이 없이는 에너지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무기물에서 유기물로의 진화를 주장하려 하여도 ‘물’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은 물질변화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다. 그러나 창조기사가 증언하고 있는 ‘물’은 단순히 무기물에서 유기물로의 변화를 위한 화학물질로서의 ‘물’만을 뜻하지 않으며, 혹은 먹을 수 없는 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에 필요한 물은 썩은 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조기사 증언하고 있는 물은 ‘사해(死海)’에 있는 물과 같은 먹을 수 없는 물을 의미하거나, 생물이 서식할 수 없는 화학물질로 오염된 폐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창조기사가 증언하는 물은 ‘먹을 수 있는’ 물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가 서식하기 위해서는 먹을 수 있는 물뿐만 아니라, ‘비’, ‘바닷물’ 등 모든 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은 생명체의 두 번째 생명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이 마시는 ‘생수’는 ‘몸과 영’을 살리는 생명수이다. 그런데 스라랴 선지자는 ‘생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종말론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 14:8)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요 6:55)라고 증언하셨으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증언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만찬 제정 말씀’에서 당신의 피를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음료수’(참조. 요 6:52-53)요, 당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고 증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또한 ‘물’이 온 지상을 덮어도 땅위의 생명체는 생존 할 수가 없다. 성경은, 온 땅이 물로 뒤덮었던 ‘노아’의 ‘홍수사건’을 생명체에 대한 심판으로 기술하고 있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땅에 창일 하매 … 땅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育畜)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 7,17-22). 물이 땅위에 기식하는 모든 생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든 땅위를 뒤덮으면, 그것은 모든 생명체를 멸종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욥기에서는 바다와 땅의 경계를 세우신 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까지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욥 38:8-11).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9)라고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은 바다와 땅의 경계를 지어주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구원자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물체가 기거하는 ‘땅’은 생명체의 세 번째 ‘생명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체의 세 번째 ‘생명여건’인 ‘뭍, 곧 땅’을 ‘하늘 아래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만드신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창 1:10). ‘땅’은 생명의 텃밭이다. 땅이 없으면 지상에 거주하는 생명은 사멸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은 일찍이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땅을 없애 버리셨다. 노아의 홍수기사가 암시해 주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땅위에 사는 짐승은 땅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은 생명체의 터전’이다. 식물이 땅에서 뽑히면, 생명을 잃듯이, 땅 곧 삶의 영역이 없는 백성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방랑하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나(= 여호와)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7); “내(= 여호와)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더 나아가 구약 성경에서 ‘땅’은 생명체의 구체적인 삶의 터전이다. 땅이 없는 사람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어서 결국 굶어 죽게 된다. 왜냐하면 농경문화 속에서 땅은 경제적 생산 도구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시켜 가는 삶의 터전이다. 더 나아가 ‘땅’, 곧 ‘흙המדאה’은, 인간의 물리적 혹은 존재론적 근원이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이러한 의미에서 ‘흙’ 곧 ‘땅’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본향이다. 하나님은 범죄 한 최초의 인간 ‘아담מדאה’에게: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 2:19) 라고 인간의 물질적 본질이 무엇인지 인지認知 시키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가 기숙하는 ‘땅’이 황폐해지면, 생명체는 땅으로부터 어떠한 수확도 얻지 못한다. ‘땅’이 황폐해 짐으로 인하여 생기는 땅의 비생산적 현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8). 반면에 인간이 땅을 너무 혹사하면, 땅이 황폐하여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땅에서 좇아내어 땅의 황폐함을 막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폐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에 너희 안식(安息) 때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폐할 동안에는 쉬리라.”(레 26:34-35) 땅의 안식과 인간의 안식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듯이, 땅의 비옥함은 생명체의 풍성함과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땅의 황폐함은 생명체의 빈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땅을 갈고 닦고 보존하는 것은 생명체, 특히 인간의 의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을 돌볼 의무를 주셨다.
이상 지금까지 - 제2강과 이번 제4강을 통하여 - ‘창조기사’를 히브리인의 인지구조에서 새롭게 읽어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 유목민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았다. 그들의 ‘생의 위기’는, 첫째는 갑작스러운 외부의 침략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이고, 둘째는 가축家畜에게 먹일 ‘물’과 풍성한 목초가 있는 ‘목축지’의 결핍으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생기는 생계의 피폐함이었다. 전자는 유목민들끼리 협력하여 싸워 극복할 수 있었으나, 후자는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혹 히브리 유목민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후자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인간의 ‘생명여건’인 ‘빛, 물, 땅’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 유목민은 모든 생명체의 ‘생명여건’을 마련해 주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생명의 하나님’, 즉 ‘모든 피조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여건’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을 증언하고자 하였던 것이 ‘창조기사’의 주된 목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성경의 ‘창조기사’를 ‘우주발생론’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히브리 유목민들의 삶의 위기 속에서 나온 ‘신앙고백’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인의 인지구조에서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이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파괴는 인간 생명의 파괴’이고,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인간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점은 나중에 십계명에 나타난 히브리인의 인지구조에서 더 자세히 언급할 것임)
어떻게 인종이 달라지게 되었는가? (How Did Human “Races” Develop?)
단지 하나의 인종이 있다. 그것은 사람 인종(human race)이다. 오늘날 '인종(race)' 이란 단어는 피부 색, 눈 모양, 머리카락 등의 육체적 특성이 구별되는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는 늦은 1800년대에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일어났다. 육체적 특성과 관련된 인종이란 단어는 성경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대신 '민족(nation)'이란 단어는 200번 이상 사용되어 있다.
인종이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아이디어이다. 비록 특성들이 폭넓게 다양하다 하더라도, 소위 인종 사이에의 유전적 분자적 변이(variations)는 사소한 것으로 확인되어졌다. 인간의 변이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거의 없거나 미미하다. 예를 들어 개(dog)의 가계에는 매우 다양한 특성들이 존재한다. 가축으로 길러지는 개에 있어서 대부분의 다양성은 과거 300년 동안에 만들어졌다. 개들은 백색, 흑색, 적색, 황색, 점박이, 작은 것, 큰 것, 털이 있는 것, 털이 없는 것, 귀여운 것, 귀엽지 않은 것 등이다. 기질과 능력 또한 매우 다양하다. 길러지는 개는 늑대, 코요테, 딩고, 자칼 등 개 종류(kind)의 거의 모든 종들과 교배할 수 있다.
생명체의 각 종들에 들어있는 방대한 양의 유전자(genes)들은 후손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러한 변화들을 허락한다. 이러한 설계된 특성이 없었다면, 멸종은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게다가 각 종 안에 변화가 없었다면, 생물체들은 매우 단순한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다음의 3가지 메커니즘은 아마도 대부분의 '인종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홍수 이후인 대략 5000년 동안에 일어났다.
1.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이 잘 확립된 현상인 자연선택은 비록 그것이 소진화(microevolution)의 중요한 메커니즘이기는 하지만, 일 세기 동안의 실험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진화(macroevolution)의 메커니즘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부모의 어떤 유전자들이 후대에서 여과되어지는 현상으로,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지만 유전적 변이가 매우 적은 후손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적도 근처에 사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피부암과 같은 심각한 위험에 보다 민감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생식 가능한 시기까지 살아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밝은 색의 피부색 유전자를 전달할 기회를 적게 가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태양 빛의 흡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피부에서 형성되는 비타민 D3의 결핍 가능성이 크다. 극지방에서 이것은 구루병(rickets)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세대가 지난 후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적도지방 근처에서, 흰 피부의 사람들은 고위도 지방 근처에서 많아졌을 것이다.
예외도 있다. 에스키모 사람(Inuits)들은 어두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북극의 위도에 산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 음식에는 많은 비타민 D3을 포함하고 있는 물고기-간 기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구루병을 예방했을 것이다.
2. 문화적 선호 (Cultural Preference)
이것은 좋아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싫어하는(편견과 같은) 형태에 따라 일어난다.
* 좋아함
'제 눈에 안경'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문화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 종족 계통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거위들에서 확인되어졌다. 파란 눈 거위(blue snow geese)는 북극의 한 지역에서 산다. 그리고 하얀 눈 거위는 또 다른 지역에서 산다. 각 집단의 알들이 한 부란기에서 부화되어졌다. 거위 새끼들은 반대색을 가진 부모들에게 입양되어 키워졌다. 어린 거위들은 후에 자라서 양부모의 색깔을 가진 거위들과 짝지으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 양부모는 분홍색으로 색칠되어졌다. 색깔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새끼 거위들은 자라서 그 색깔을 가진 짝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래된 노래 ''I Want a Girl Just Like the Girl That Married Dear Old Dad' 는 이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싫어함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매우 심하다. 육체적 모습에 기초한 편견은 전쟁, 학살, 강제 격리, 자발적 분리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태인들과 몇몇 인종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리안 종족에 대해 극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인종에 대한 극도의 편견은 유태인 종족의 감소와 아리안 종족의 증가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자발적 분리의 예는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다. 평균 키가 135cm 정도인 피그미(Pygmies)족은 간혹 210cm의 큰 키를 가지는 와투시(Watusi)족과 분리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두 종족은 서로 수백 마일 이내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것들과 수천년 동안 계속되어진 수많은 다른 편견들은 많은 종족들을 육체적 모습에 의해 분리시켜 놓았다.
3. 소수의 고립된 인구집단들
전체 인구 집단, 또는 여러 생물체들의 전체 집단은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집단 내에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집단에서 소수가 고립된 지역으로(예로 섬과 같은) 이동되었다면, 새로운 그룹은 전체 집단에 비해 매우 적은 유전적 특징(또는 유전형질의 적은 범위)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세대가 흐른 후, 섬에는 원래의 집단과는 다른 종족이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리석(marbles, 반은 흰색, 반은 검정색)으로 채워진 통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자, 각 대리석이 사람을 나타내며, 대리석의 색깔은 사람의 피부 색깔에 대한 유전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해 보자. 만약 일부의 대리석이 무작위로 취해져서 격리된 섬들에 놓여진다면, 그 섬들은 한 색깔의 대리석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이 분산되고 고립되었을 때도 어느 정도 유사할 수 있다. 각 사람들은 피부색깔에 대해 여러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같은 피부색(검은, 또는 흰)의 유전자를 가진 채 고립되어 졌다면, 그들의 후손들은 똑같은 피부색을 가지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다른 유전적 특성들도 마찬가지로 대리석의 색깔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실제, 이 과정에 대한 유전학은 이러한 간단한 설명보다는 더욱 복잡하다. 예를 들면, 피부색을 결정하는 데는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의 유전자가 관여한다. 또한 수천의 종족들이 있다. 작은 그룹들이 큰 집단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그들의 각각은 지리적으로 격리된 지역에서 제한되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특성들이 쉽게 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수 후 여덟 명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 흩어질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창세기 10-11장에 나타나는 노아의 후손들의 목록에서부터, 우리는 초기의 이동 형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셈의 직계 후손들은 일반적으로 아라랏산 근처(오늘날의 터키 동쪽)에 머물렀고,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함의 후손들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면에 야벳의 후손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작은 그룹들이 고립된 지역에서 정착하면서, 그들의 독특한 유전적 특성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발현되어졌을 것이다.
이 3가지 메커니즘(자연선택, 문화적 선호, 고립된 인구집단)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이제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을 해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비슷하게 생겼을까? 분명히 그들의 유전자는 오늘날 모든 종족들(아마도 사라진 다른 종족들까지)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있었던 유전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보여지지(발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유전자들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아담과 하와는 서로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중간의 어떤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담의 히브리어 말은 '붉음(redness)'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붉은(red)', '피를 보다(to show blood)'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피부색은 미국 인디언의 피부색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140여 년 동안 진화론은 매우 다른 한 그림을 그려왔다. 사람들의 조상은 원숭이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추정해왔다. 진화론에 의하면, 일부의 초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가지가 분리되어져서, 그들이 다른 육체적, 정신적, 행동적 특성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민족들을 비인간화시키고 있는, 그리고 매우 편견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인종우월주의(racism)인 것이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을 인종우월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비록 다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인종우월주의자 였지만). 인종우월주의는 오늘날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대중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진화론은 인종우월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해 왔던 것이다.
창세기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 노아와 그의 부인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사촌이라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고 행동한다면, 세계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Walt Brown (창조과학회)
도박은 죄인가? 성경은 도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대답: 성경은 도박, 내기, 복권을 특별히 죄로 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10; 히브리서 13:5). 또 일확천금으로 부자가 될 생각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잠언 13:11; 23:5; 전도서 5:10). 도박은 대부분이 돈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도박의 잘못된 점은 무엇일까? 도박은 다루기 힘든 화제입니다. 가끔 지나치지 않게 하는 도박은 돈을 낭비하는 것 이지만 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불필요하게 비싼 음식을 먹을 경우나, 살 필요가 없는 물건을 구입하곤 합니다. 도박은 그러한 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도박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낭비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잉여로 남은 돈은 미래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저축되어야 하지 도박으로 없애면 안됩니다.
성경은 도박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운”이나 “기회”라는 단어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예를들어 레위기 에서는 추첨을 통해 재물로 드릴 양과 속죄양을 골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추첨을 통해 다양한 부족에게 땅을 할당 하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느혜미야는 추첨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에 살 사람들을 결정했습니다. 제자들은 추첨을 통해 유다의 후계자를 결정했습니다. 잠언 16:33은 말합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성경은 카지노나 복권에 대해 뭐라고 말하려 했을까요? 카지노는 도박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돈을 벌어내는 시장입니다. 그들은 가끔 값싼 술이나 공짜로 술을 제공합니다. 그로 인해 술에 취하게 되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카지노 안의 모든 것은 큰 돈을 가져가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공허한 즐거움만 빼고 말입니다. 빠른 시간내로 부자가 되는 것은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 됩니다. 미소한 확률을 쫓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삶을 파멸로 이끕니다.
복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복권이나 도박으로 얻은 이익으로 교회나 다른 선한 일에 쓰겠다고 합니다. 동기는 좋으나, 도박에서 딴 돈으로 신성한 목적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조사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복권 당첨자들의 경제 사정이 당첨된 후가 당첨 전보다 훨씬 나쁘다고 합니다. 설령 경제사정이 좋아진 사람도 선한 일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잠언 13:11은 말합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하나님은 정직한 방법을 통해 교회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약물이나 은행절도로 얻은 돈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겠습니까? 빈곤한 자가 부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훔친 돈은 필요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6:10 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또 히브리서 13:5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또 마태복음 6:24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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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그레트리 | Andr? Ernest Modeste Gretry ( 1741.2.10 ~ 1813.9.24 )
벨기에 출생의 프랑스 작곡가. 대부분의 작품이 오페라 코미크이며 그 외에 진혼곡,실내악곡 등이 있다.
앙드레 에르네스트 모데스트 그레트리(Andr? Ernest Modeste Gr?try, 1741년 2월 8일~1813년 9월 24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원래는 벨기에 출신이나 프랑스에서 활약, 특히 오페라 코미크의 유행작곡가가 되었다.
그레트리는 프랑스 음악에 감각의 정묘함과 표현의 명쾌함을 가져왔다고도 하며 멜로디의 서정적인
노래와 생생하고 솔직한 표정으로 '프랑스의 페르골레시'라고도 한다.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예술 - 음악 출생지 : 벨기에 주요작품 : 《사자왕 리샤르 Richard Coeur de Lion》 벨기에 출생.
교회의 소년합창단원으로 있다가 1761~1766년 로마에 유학하여, 카잘리와 마르티니의 지도를 받았다.
그 후 1년간의 스위스 생활을 거쳐 1768년 파리에 정착하여 오페라코미크 작곡가로서 유명해졌다.
프랑스혁명 후에는 파리음악원의 교수로서 활약하는 한편 많은 저서를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이 피치니와 페르골레시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 코미크이며,
대표작 《사자왕 리샤르 Richard Coeur de Lion》 외에 진혼곡, 실내악곡 등이 있다.
전체 작품과 해설 바로가기) http://cafe.daum.net/shamaimprayer/AtJ2/1148
세계화 시대의 협력 선교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담임, 합동신학대학원 겸임교수)
협력과 동역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의 하나이다. 역사적 안목과 초문화적 경험이 부족한 한국교회의 선교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다. 교회 분열과 선교 갈등에 결코 뒤 지지 않는 한국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여전히 협력과 동역이다. 나는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다음과 같은 사역에 참여했고 다음과 같은 글들을 발표했다.
1)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 창립(1988.1.18), 초대 총무 2) (미주)한인세계선교대회 개최(1988.7.25-30, 시카고), 준비위원 3)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창립(1990.6.25), 창립회원 4) "Cooperation and Partnership in Missions"("선교의 협력과 파트너십") AMC(아시아 선교대회, 1990.8.27-31), 주제강연 5) "Principles of Two-Third World Mission Partnership" Consultation on Partnership for World Mission(세계복음화를 위한 파트너십 협의회, 1991.5.9-11, 시카고), 주제강연 5) "일본교회와의 사역의 협력" 제3회 일본전도대회(1991.6.4-6, 시오바라), 주제강연 6) "한국교회와 연합운동" 「한국교회 쟁점진단」(1998 규장).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기 전에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볼 때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은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세계화는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정책이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계를 섬김과 아울러 함께 삶의 대상으로 보는 정책과 자세가 올바른 세계화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세계화 시대의 세계 선교는 북한이나 모슬렘권 등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섬김과 아울러 함께 삶의 대상으로 본다. 만약 북한이나 모슬렘권 등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닌 십자군 전쟁이다.
나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눈과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사야와 요나 등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폭 넓은 눈과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이사야 19:23-25이라고 생각한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서 복이 되리라 그 날에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나의 백성 나의 산업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높고 넓은 생각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열정이 뜨겁다고 할지라도 북한을 미워하고 일본을 질투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무시하는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선교의 협력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년 전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연접하고 있는 곳에서 이사야 19:23-25을 읽으며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느껴보려고 애를 쓴 일이 있다.
나는 북한을 미워하고 일본을 미워하고 러시아를 미워하고 중국을 무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나는 북한을 사랑하고 일본을 사랑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존중한다. 선교의 전망이 어둡고 선교의 열매가 거의 없는 터키와 모슬렘권에 선교의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기 전에 선교현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교현지의 사람들은 문화와 가치관과 생활습관이 많이 다르다. 부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지닐 수도 있다.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지배하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저들을 섬김의 대상으로보다는 정복의 대상으로, 하나의 노획물과 전리품으로 볼 수도 있다. 구약의 예표들을 내세우며 그와 같은 자세를 정당화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은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나는 선교 현지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배하는 대신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품은 한 선교사의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은 일이 있다. 그는 중앙 아시아 알마타에서 사역하던 신송태 선교사이다. 그는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서 현지인들을 품고 섬기는 자세로 선교에 임했다. 때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 가슴을 치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한번은 자기가 그렇게도 신임하던 고려인 신자 정 모씨가 갑자기 교회를 떠났다. 정 모씨는 교회를 떠나갈 때 신 선교사에 대한 온갖 중상 모략을 다 했다. 정 모씨가 떠난 후 고려인 교인 50여명이 모두 함께 다른 교회로 갔다. 신 선교사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며 울면서도 한 사람에게도 화를 내거나 비방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정 모씨가 갔던 다른 교회의 한인 목사의 약속이 거짓인 것이 드러났다. 정 모씨는 다시 신송태 선교사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신 선교사는 정 모씨를 향해 자기에게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고 만류하며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50여명의 신자들도 다시 돌아왔다.
한 번은 신 선교사가 교회 건축 공사의 일부를 현지 카자흐스탄 인들에게 맡겨서 일을 시켰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너무나 게을러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삽질 한번 하고는 앉아서 술을 마시고 삽질 한번 하고는 앉아서 노는 것이었다. 결국 2달에 마칠 공사를 7개월을 걸려서 마쳤다. 현지인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욕을 먹지 않고 일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욕을 먹지 않고 일을 한 것은 이번 뿐이라는 것이었다. 신송태 선교사의 신념은 분명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교하러 온 현지인들과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 선교사는 또한 현지인들과 현지 문화를 존중하면서 사역에 임했다.
신 선교사는 카자흐 민족의 거성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민족의 지도자 아바이의 잠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카자흐어와 한국어를 병행하여 아바이의 잠언」을 출판한 일이 있다. 이 출판은 현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한인 선교사를 높은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신 선교사가 카자흐스탄 국무총리 명의로 된 감사 증서까지 수여 받았는데, 그 증서만 보여주면 비자 발급을 비롯해서 거의 안 되는 일이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교현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귀하게 여겼고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 여인을 귀하게 보셨던 것처럼 우리도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따듯한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3 동역자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교의 사역보다는 선교의 동역자를 귀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따뜻한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역에 지나친 열정을 혼자서 다 쏟다가 그만 동역자들을 귀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동역자들을 바라보는 너그러운 눈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 혼자뿐 아니라 나에게 사역의 동역자들을 붙여 주시고 그리고 현지의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사 바울은 선교사역을 혼자서 한 일이 거의 없다. 언제나 동역자들과 함께 일했고 현지 사역자들에게 사역을 넘겨주곤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요 예수님의 방침이다.
나는 선교의 동역자들을 귀하게 여기며 따듯하게 바라보면서 협력선교를 이루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로 블라디보스톡을 생각한다. 블라디보스톡에는 통합측에 속한 정균오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사역하는 신학교가 있다. 현지인을 양성하는 이 신학교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 현지에서 사역하는 다양한 교단 소속의 한인 선교사들이 아름다운 협력을 이루고 있다.
구세군을 비롯한 다양한 교단과 단체에 소속한 여러 선교사들이 신학교 사역을 함께 협력하며 개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서로 격려하며 돕고 있다. 어느 선교사가 교회당을 건축할 때 다른 교단에 속한 선교사들이 교회당 건축헌금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구소련 각지에서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들은 이제 현지인들을 많이 양육하여 내일의 사역자들로 키우고 있으며 그들과 아름다운 동역을 시작하고 있다. 마스크바 미르교회에는 제니슨과 릴리야라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있는데 저들은 기도와 말씀과 전도에 전력하며 담임 목사인 허충강 선교사와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고 있다.
이제는 현지인 사역자들을 많이 양성하여 현지 사역을 주도하도록 격려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현지 사역자들을 현지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인 선교사들은 선교의 동역자들은 물론 현지인 동역자들을 귀하게 보며 격려하는 따듯한 마음과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할 때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경륜을 거스릴 수도 있다. 동역자들을 귀하게 보며 격려하는 너그러운 마음과 눈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선교의 협력과 동역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이다.
4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협력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선교사 자신이다. 그것은 선교에 있어서 뿐 아니라 목회와 모든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유능하게 보기 때문에 즉 자기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를 과소평가하며 자기를 하나님의 큰 유기적 사역의 한 부분으로 보는 긍정적인 역사적 안목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협력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임택진 목사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일이 있다. 한국교회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우상화한 것이 바로 교회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가 한 편에서는 김재준 목사를 다른 한 편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박형룡 목사를 우상화한 것이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올바른 지적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큰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더욱 더 그렇다. 그것을 본 받은 선교사들도 자기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며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결국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한 편으로는 역사적 안목과 유기적 연계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협력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초문화적 경험과 민주주의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라보는 겸허한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구속사의 한 점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로 바라보는 긍정적인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왜곡하며 교회분열을 조장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목회자 또는 선교사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를 시도했다. 먼저 자기 자신을 극도로 낮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린도 교회가 각각 자기의 지도자들을 높이며 그들을 추종하려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질책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며 바울은 무슨 물건이뇨?"
바울은 일부러 멸시의 의미를 나타내는 중성명사를 사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볼로나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조금 내려가서는 자기를 가리켜 "만물의 찌끼"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자기 자신을 바울처럼 극도로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협력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낮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라고 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중요한 도구와 그릇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체의 비유를 즐겨 사용하면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 협력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고 지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자기를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겸허한 자세와 동시에 자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택하여 사용하는 충성된 머슴의 한 사람이라고 보는 긍정적 믿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5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진정한 협력과 동역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0년 전 일본 시오바라에서 개최된 제3회 일본전도대회에서 사역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곳에 모였던 1200여명의 일본 지도자들에게 한 말을 여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늘 밤 우리들은 '인간적' 또는 '문화적' 이야기를 하려고 모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기 위해서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 밤에 하나님은 이야기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너희들은 모두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모두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동역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 있을 수 없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나뉘어져 있을 수 없고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이야기하실 때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신자들이 더 이상 다투거나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합되지 않을 수 없었고 개인주의와 지방주의와 민족주의의 죄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심하게 되었고 전도에 전력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에게 이야기하실 때 그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나뉘어 있을 수 없게 되었고 흑인들과 백인들로 나뉘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연합하고 협력하여 예배와 기도와 선교에 전력했습니다.
1907년 하나님께서 장대현교회에 모인 천여명 신자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향한 미움의 죄를 고백하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목사를 미워하던 죄, 선교사를 미워하던 죄,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에 진력했습니다."
그날 밤 나의 호소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다. 일본을 미워하던 나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빌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야기를 함께 듣자고 호소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눈물과 화해와 사랑을 자아내게 만드셨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 복음주의 교회들과 한국복음주의 교회들간의 협력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나는 자주 말한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옳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선교와 목회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루어야 할 근거와 이유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선교에 있어서 협력은 가능한가? 아니 도대체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언론인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협력이나 연합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진단한다. 정진경 목사는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일치와 연합을 저해하는 두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첫째는 지도자들의 사욕이요 둘째는 개교회주의 또는 개집단주의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일치와 연합의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령이 역사해야 하고 선각자들이 희생적으로, 실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 다른 지도자들을 자기보다 높이며 겸손해질 때에 진정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일치와 협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부언했다. 올바른 지적이다. 선각자 열명이 나타날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은 조금씩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의 가능성을 어둡게 보면서도 선교에 있어서 협력의 가능성은 조금 더 밝게 보고 싶다. 윗물이 흐려도 아랫물이 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비유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협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그네들이 고향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초문화적 경험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좁은 한반도 안에 앉아서 영남이 어떻고 호남이 어떻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오직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어가는 선교사들이 교회나 교단이라는 조직체에 매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몸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을 했는지 모른다. 아니다. 지금 선교지 곳곳에서 선교의 협력이 이전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선교의 협력이 보다 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것을 주님이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선교에 아름다운 협력과 동역이 불라디보스톡과 마닐라와 몽골과 타시겐트 등등 세계 곳곳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총신 100주년 특집 <세계선교 39호>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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