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야궤 앞에서 기쁨과 슬픔
샬롬^^
오늘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 깜짝 놀랄 일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중국'에 들어가 계시는데, 그동안 새벽기도를 다른 목사님과 나누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틀을 배저 받았다고 생각해서 어제까지의 말씀을 열심히 묵상하며 준비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는 평안한 마음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의자에 앉아 있는데,^^ 아, 이런 다른 목사님께서 평상복 차림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ㅋ~^^ 어찌 이런일이! 서로 놀라서 이야기를 잠시 해보았는데, 서로 착각해서 '하루'가 펑크나 버렸습니다. 저도 '양복'을 입지 않아서...그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쑥스럽고 죄송하고 하나님 앞에서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시편 1편을 폈습니다. 오랜만에 설교문 없이 설교하게 되었는데, 20대 중,후반에는 '설교문' 없이 설교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20대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설교 원문이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는 신념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집중하며 설교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실수도 많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후 처음으로 '설교문'없이 강단에 섰습니다.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20여분 말씀에 대한 강론을 행한 뒤 기도하고 강단에 엎드려 있는데, 주님께서 마치 '수고했다 아들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설교문을 보지 않고 영감으로 바로 설교하면 참 위험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순간적인 성령의 역사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설교자의 모습 때문에 '해석의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는 설교 원문을 모두 작성해서 설교를 해오고 있습니다. 제 모든 말을 다 기록해 놓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이제 조금은 스스로 '자유'해져도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약간의 자유를 성령 안에서 누리고자 합니다. 제가 60이 되면 이 약간의 자유를 누리고 했는데, 오늘 새벽 사건으로 조금 앞당겨진 듯 합니다.^^
오랜 만에 긴장하면서 설교했던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힘이 배가' 들었고, 오늘 아침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잠'이 자꾸 오려고 하네요. 그래도 잠을 물리치고 힘차게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벧세메스의 사건은 제게 여러 각도의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신 다곤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언약궤를 처리했습니다. 언약궤가 베세메스로 곧장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멈추어 섰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언약궤가 자신들 앞으로 다시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실어 놓은 것들을 내려 놓고 이스라엘의 제사법으로 암소를 잡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블레셋 방백들과 지도자들이 이제 되돌아 갑니다. 자신들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성읍의 수대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블레셋 사람들은 우매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보면서도 다시 자신들의 신 다곤으로 되돌아가는 영적 맹인의 길을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일어나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맹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매우 거룩한 물건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언약의 말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언약궤의 내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숫자가 (오만)칠십명이었습니다. 엄청난 저주가 임했습니다. 아니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거룩한 언약궤를 가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죽음을 임하는것을 보면서 가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법궤를 가져갈 것을 알립니다.
저는 오늘 사무엘상 6장 19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라는 말씀에 마음이 멈추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면서 기뻐하였던 이들이 왜 슬픔에 빠졌을까요? 놀라운 것은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되는 언약궤'를 자신들의 임의로 들여다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 앞에서 자신들의 판단과 자신들의 생각에 괜찮을 것 같아서 잠시 들여다 보았지만, 하나님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거룩한 법궤'를 들여다보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게 '신앙생활'은 '자신의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고 법도가 있습니다. 그것에 반하는 자들에게는 '슬픔'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도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도'라고 말해도 좋을 듯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 변호시키는 역사 없이 법궤를 얻은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약궤 앞에서 슬픔이 아닌 기쁨을 얻는 역사는 우선 '두려움'의 경외 의식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이 바로 이로부터 출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어느 날
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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