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자유하심의 영광과 계시의 해위적 해석
샬롬^^
지심 정경호 목사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학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학읽기는 신학적 접근의 기초작업에 속합니다. 읽으면서 토론하면서 이야기되는 내용은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해 줍니다. 이 읽기를 통해서 더 깊은 신학적 통찰이 생겨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계시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유에 관한 명제는 이중적 '해석'을 허용한다. 하나는 형식적이 해석으로서,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적인' '역사적' 말씀에도 속박되지 안흔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본래적 말씀은 자유롭다......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온전히 자유로우시며, 모든 주어진 것과 '조건적인 것들'에 무조건적으로 마주선 채 존재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자아, 곧 인간들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과 관계는-그 관계의 '불변성'이 지속적일 뿐 아니라 어떠한 순간에도 참으로 진지하게 '처음과 더불어 시작하는'(mit dem Anfang anfangenden) 행위의 불변성 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자유롭지만 비(非)정적인 관계가 되엉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이미 주어진 것으로, 즉 이미 현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자연법의 관점이나 수학적인 기능의 관점에서 파아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 관계는 항상 행위적으로, 즉 그렇게 일어나고 있는 '행위'의 '불안정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계시는 순수하게 행위를 향해 해석된다. 계시는 매 순간 자유안에서 하나님가 인간의 관계를 지양시킬 수도 있는 자유 속에서 말씀을 듣는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 95. 중 "계시의 우발성"에 대한 내용에서-
하나님의 선사나 하나님의 자기거부의 자유하심이 계시 안에는 여전히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본회퍼의 글은, 이제 계시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유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논하기 시작한다. 본회퍼의 글은, 하나님은 속박당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뜻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정의는 당연한 것이다. 우주만물의 주인이 피조물에게 조종당할 수는 없다. 그러는 순간 그 존재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명제 앞에서 우리는 암담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기도는 무용지물인가? 본회퍼는 "계시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유에 관한 명제"는 "이중적 해석을 허용"함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지 않으셨지 않는가? 우리는 이야기한ㄷ. '하나님은 언약'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약의 말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유하시다. 이 언약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주실 수 있고, 그것을 빼앗을 수도 있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는 이 모든 상황의 현실 속에서도 자유로우신 채로 마주 서 계실 수가 있다. 본회퍼는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자유 안에서 마주 서 계심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자유로우시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영광을 드러내실 수도 있고, 그것을 감추실 수도 있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본회퍼의 논리는 이 영광의 드러내심은 '말씀'의 계시가 우리 안에서 드러낼 수도 있고 감추어질 수도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감추이거나 드러내는 역사는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보여질 수 있는가? 그것은 "행위"이다. "이 관계는 항상 행위적으로, 즉 그렇게 일어나고 있는 '행위'의 '불안정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계시는 순수하게 행위를 향해 해석되다."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냄은 말씀의 계시를 우리의 행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우발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유는 우발적이다. 그래서 우발적 영광의 자유는 곧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고,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써는 감추어질 수 밖에 없는 불가능의 해석을 허락하게 된다.
계시의 해석은 고로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우발적 영광의 모습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진리의 해석이 참될 때 우리는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이것은 순전히 우발적이다. '순수한 행위'는 무엇인가? 순수한 믿음을 통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인가? 사람에 의해서 변질된 믿음이 아닌,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묻지 않은, 세속적이지 않은, 인간의 추리적 해석의 한계를 초월한 참된 이성적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우발적이고 영광을 드러내시는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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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 머리가 너무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그래도 행복하네요. 위의 글을 읽는 제 이해가 어떤 부분이 편협한지 또 연구해야 보아야 할 것 같습닛다. 다만 지금 제가 작업하는 이 작업은 '단순함'을 추구하고 '쉬움'을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해악'적인 글일 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와 부조화, 그리고 순수하지 못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이러한 글을 읽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분노'를 감다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현실의 잘못된 부조리와 성경의 잘못된 해석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말씀'이라기 보다느 '사탄에 미혹된 지극히 세속적이고 지극히 사탄적인 자기 암시'인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의 말씀을 '우발적인 은총'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깊은 고뇌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작업으로도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회퍼의 말처럼 '순수한 영성적 행위'가 뒤따라야 하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실하다는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전혀 신실하지 못하고 전혀 말씀과 상관 없는 자기 체면을 행하는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봅니다. 이들을 향한, 혹은 제 자신을 향한 유일한 기도는, '하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참되게 비추이는 용기가 있는 자만이 '계시의 알아차림'은 허락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앞으로 '지심과 신학하기'는 있는 그대로 비판하고 수용하고 새롭게 하는 장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어느 날
지심
참 한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신학하기는 '신학의 이론'을 말하는 방이 아닙니다. 이 글들은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이고, 함께 고민을 공유하는 작업의 장입니다. 그래서 이 방의 글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도 필요하고 그래서 도전적인 글의 전개도 필요하겠지요. 때로는 글을 쓰는 사람이 혼돈에 빠질 수도 있음을 여러분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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