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의 역사적 이해
* 관상기도
관상의 개념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관상 기도의 모든 과정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이곳에서는 관상 기도로
이끌어져 가는 모든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침묵과 관상, 그리고 관상기도의 단계를
살펴봄으로 관상에 대한 모호한 이해가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1) 침묵의 역사적 이해
관상에 있어서 침묵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상의 목표는 바로 일치에 있으므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침묵은 이와 같은 깨달음을 위해
성서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주게 하며, 그리고 침묵
속에서 자신이 고요해지게 함으로 계시의 깨달음,
즉 일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침묵에
대하여 시편 62 : 1에서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표현하고 있고, 광야의 교부 암모나스(Ammona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네게 침묵의 힘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교하는지,
또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침묵에 의해 성도가 자라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들 안에 거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침묵은 영적 성숙과 또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는데, 침묵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것을 방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사회, 문화, 종교구조들에 대한 잘못된 역할에
대하여 씨름하게 하고, 이 ‘침묵의 씨름’은 거짓된
문화에 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능은 침묵 속에서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서 맛을 보게 하며 소화되게 하며, 흡수되어서
거짓자아를 도려내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즉 침묵의 첫
계시는 우리를 더욱더 고요하게 만들고, 이 고요함은 바로
자기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데, 이러한 계시는 자신 안에서
지혜, 평화, 기쁨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얻게 되는
성소의 입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침묵에 대하여 기독교의
영적 전통을 살펴보면, 침묵을 초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기도의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침묵의 초대는 대부분 사람들의 방황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마음의 방황과 내적인 동요가 심하여서
도저히 고요하게 생활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이 침묵의 표지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이 채워질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서,
채워지지 않음은 인간을 동요하게 하고, 이 동요는 엄밀하게
말해서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서 끝없는 격정과 함께
인간의 내면에 가득찬 모든 거짓된 유한한 것, 그리고 지상의
것들을 파괴시키는 정열(Leidenschaft)을 일으키는 현상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침묵은 하나님의 첫 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관상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4세기에서 5세기에 사막의 교부들의 어록에서도 이러한 침묵의
가치들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는데, 5세기의 수도자
은자 존(John the Solitary)은 “하나님은 침묵이시다”라고 말했고,
동방정교회 영성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헤시키아(hesychia)가
아토스 산(Mount Athos)을 중심으로 ‘내적 침묵의 획득’이라는
침묵 영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중세
서양의 신비주의 작가 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토마스 아 캠피스는
침묵과 정숙 속에서 신앙의 성숙은 이루어짐을 그리고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를 깨닫게 됨을 말한다. 또한 동방신학자
나지안주스(St Gregory Nazianzus)와 시므온(St Symeon)은
신학자의 자질들 중에서 침묵과 내적 평화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는
사실은 모든 영성에서 침묵이 중요함을 알게 한다. 이러한 침묵의 흐름은
십자가의 성 요한으로부터 퀘이커의 조지 팍스(George Fox), 그리고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까지 영성생활의 기초가 됨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19세기의 러시아 디오팬 더 레클루스(Theophan the Recluse)는 침묵에
대하여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며, 계속해서 끝날까지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그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침묵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공동체 생활』140장에서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들은 내적 침묵을 위하여 외적 침묵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침묵 장소와 침묵 시간을 지킬 것이며, 수도원 내의
특정한 장소를 제외하고는 이를 어김을 금한다(수도서 8, 4, 15).”고
말함으로써 내적․외적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침묵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침묵에는 외적인 침묵과
내적인 침묵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침묵을 말함에 있어서 본 소고에서는 외적인 침묵을
‘외재적 관상’, 내적인 침묵을 ‘내재적 관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외적인 침묵이 깊어지면서 내적인 침묵으로 흐르게 되는데,
이 과정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관상으로 들어가게 하는 하나의 입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관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침묵을 본 소고에서는 관상의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 침묵과 관상은 같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관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이라는 입장에서 침묵을 바라볼 때
이것을 외재적, 내재적 관상이라고 본다. 이 두 가지의 외재적,
내재적 관상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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