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상의 교회사적 의미
관상 형태의 기도를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의 에바그리오, 요한 카시안, 그리고
성 요한 클리마코 등과 같은 사막의 교부들이
수련했고 가르쳤으며, 시대를 따라서
많은 영성가들과 성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행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면, 교부시대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대 그레고리오,
동양에 유사 디오니시오와 헤시카스트들과
중세시대에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티에리의 윌리암, 카투시안인 귀도,
그리고 라인랜드의 신비가들인 성 힐데가르다,
성 메헤틸트, 마이스터 에카르트, 루이스브뢰크 ,
타울러, 그리고 14세기 영국의 신비가들인
『무지의 구름』과 월터 힐튼, 리처드 롤,
노르위치의 줄리앙, 또한 종교개혁 후에
갈멜수도회의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리지외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프랑스 학파의
프란치스코 드 살, 샹탈의 성 제인, 베룰 추기경,
예수회 소속인 드 코사드, 랄르몽, 수린 신부들,
베네딕토의 아우구스티노 베이커, 요한 차프만,
그리고 현대 시토회 중 비탈 르호디와 토마스 머튼
등등의 관상 신비가들이 있어왔다.
관상의 흐름은 이렇게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는
보편적인 기도의 방식이었으나, 교회 역사의 흐름에
의해서 많은 오해를 받게 되면서
관상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 인식은 위에서 말한 대표적이라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특별히 이러한 관상의 역사적 흐름을 좀더 살펴보면,
6세기에 대 그레고리오에 의해 관상이 집약되었다.
그리고 12세기에는 관상에 대한 큰 학파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학문적인 구분으로 인해서
처음에 있었던 관상의 개념들이 점점 형식화되어 갔으나,
특별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 빅토 휴와 리처드,
성 티에리의 윌리엄 등의 12세기 영성 지도자들은
더욱 이 관상기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발전시켜 나갔고,
13세기에는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대중화되기도 하였다.
14세기와 15세기에 대흑사병과 100년 전쟁이 일어남으로
많은 도시와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이러한
혼란은 도덕과 영성의 퇴폐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정치적인 대립 영향으로 인하여
관상의 가르침의 흐름이 끊기는데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522년에서 1526년에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이 저술되었고,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관상의 명맥을 다시 한번
잇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설립자라 볼 수 있는
이냐시오의 이러한 관상적 이해에 대하여,
그의 뒤를 이었던 자들이 ‘관상’이라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관상은
다시 잊혀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무관심과
더불어 관상에 대한 오해는 관상을 더욱 잊혀지게 하였는데,
그것은 인노센트 12세에 의해서 관상은 ‘정숙주의’로서
잘못된 신비주의라는 단죄를 받은 사건과,
17세기 ‘얀센주의’로 인해서 잘못된 선입관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정숙주의와 얀센주의를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숙주의를 살펴보면, 17세기 영성은 은혜의 문제에
의해 지배되었다. 정숙주의는 몰리노스, 그리고 마담 귀용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16C와 17C 신비주의 물결에서
중요한 이슈에 해당된다.
마담 귀용(Jeanne-Marie Bouvier de la Mothe Guyon, 1648-1717)의
모험적이고도 전설적인 삶의 역사는 그것이 대주교인 프랑스와
페넬롱(FranҪois de Salignac Fènelon)과의 놀라운
우정에 빛을 비춰 주는 한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 젊고도 부유한
과부로서 그녀는 정신적인 기도의 방법을 탐구했다.
그녀는 소녀 적에 성 샹탈(Saint Chantal)의 글들을 읽었다.
그녀는 비슷한 영적 경험을 갖고 있는 바나바의 사제인
라콩부 신부(Father La Combe)를 만남으로 상호 영적인 교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을 함께 여행했으며 정신적인 기도의 실천을
통한 완전한 포기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어떤 의심스러운 윤리적인
행동보다는 상호 칭찬해 준 것이 그들의 실패였다.
그들은 비난받았던 몰리노스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으며
그렇게 의심받았다. 신부 랑콩브는 감옥에 갇혔고
정신적으로 황량한 상태에서 죽었다. 마담 귀용은 파오부르크
성 안토인에 있는 방문회 수녀들에게 보내졌다. 1688년 10월에
석방되어서 마담 귀용은 페넬롱을 만났다. 페넬롱은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영성에 관한 그의 책에서, 그녀는 어떤 감각적인
이미지로부터 기도에 있어서 초월(detachment)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마담 귀용의 글은 어떤 체계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그녀
마음의 발산이었다. 페넬롱은 그녀를 영성신학에 소개시켰으나
그는 그녀 안에서 ‘초월’의 살아 있는 예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얻기 원했던 하나님에 대한 내적 열림이었는데 그는
그의 빈틈없는 이성주의에 의하여 패배했다.
페넬롱의 개인적인 딜레마는 보편적 지식으로 이끄는
데카르트의 인식과 하나님에게로 이끄는 어거스틴의 인식
사이에 있다. 페넬롱은 데카르트의 자기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나누지 않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나는 거의 내가 아닌 것이다.’
마담 귀용에 있어서, 그리고 정숙주의자의 영성에 있어서
영혼은 그 자신을 영원히 하나님께 맡긴다. 그래서 더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페넬롱은 이 생각과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이후 여러 논쟁 속에서 마담 귀용은 잘못 해석되어서
1699년 3월 교황 이노센트 12세에 의해 정죄되게 된다. 그러나
이 정죄는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 라고 보아야 한다.
페넬롱의 개념들은 미래 지향적이었는데, 이 민감성은
18세기에 매력을 얻었다. 그 좋은 예라 볼 수 있는
『성자들의 격언』은 1698년 2월에 영국에 번역판으로
칭찬의 소개와 함께 나오게 되었다.
영국과의 연계점 역할을 한 자는 램지(Ramsay)였는데,
그를 통해서 퀘이커 교도들, 18C 초반 애버딘에 있는
감독주의자(episcopalian) 그룹들, 그리고 웨슬리에게까지
페넬롱의 글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얀센주의(Jansenism)의 운동은 루베인 대학에서 연원되었고,
이것은 두 사람 즉, 코르넬리우스 얀센,
또는 얀세니우스(Cornelius Jansen or Jansenius)와
장 두베르지어 드 하우란(Jean Duvergier de Hauranne)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특별히 얀센은 『아우구스티누스』(The Augustinus)라는
1300쪽에 이르는 대작을 1640년에 출판하게 되는데,
1638년에 그는 이미 죽었었다. 이 책은 사실상 타락과
자유의지와 예정과 은혜에 대한 얀센의 개인적인 해석으로서,
이 책의 처음 부분에서 그는 펠라기우스 주의와
반 펠라기우스(semi-Pelagianism)주의를 검토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조용히 몰리나주의를 포함시킨다. 이 내용을 보면,
어거스틴은 타락하기 전의 인간과 타락 후의 인간을 구분하는데,
타락 전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주어져서 하나님에게 의존했다.
타락 후의 인간은 악으로 전환했다. 인간은 자유의지의 능력을 잃고
이제는 강한 육욕의 노예가 되었다. 아담에게 주어진 은혜와 그리스도의
치유적 은혜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아담에게 주어진 은혜는
그가 감내하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인간의 자유 협동과 관계된다.
후자인 그리스도의 은혜는 영원히 활동하며 자유의지를 초월한다.
진실로 이 효력이 있는 은혜는 원죄에서 잃은 자유를 돌려준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얀센에 따르면 충분한 은혜는 더 이상 인간의 타락한 성품으로 볼 때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chimère)’이다.
따라서 얀센은 몰리나의 입장을 거절하는데, 몰리나에 따르면
충분한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자유 동의에 따라서 주어진다.
자유의지의 이러한 얀센의 입장은 개혁자들의 입장과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얀센주의의 논란이 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말한 자유의지에 대한 펠라기우스 주의와
반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과
둘째,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죽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1642년 3월 교황의 칙서(the Bull In eminenti)에
의해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비난에 의해 얀센주의는 몰리나 주의,
또는 반 펠라기우스 파로 인정되어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
소르본느측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5가지 입장으로 발표되었다.
1. 하나님 명령의 어떤 것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불가능하다.
2. 타락한 성품의 상태에서는 내적인 은혜에 대하여 어떤 저항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3. 미덕과 부덕에 대해서 인간은 필수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으로부터의 자유를 필요로 한다.
4.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이단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은혜에 저항 할 수 있으며 거기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은
반 펠라기우스적이다.
로마는 이 다섯 개의 입장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입장은 얀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논쟁은
계속 되었고, 파스칼의 『팡세』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계속해서 논쟁되어지면서 여러 번의 비난을 받게 된다.
포트-로얄과 얀센니즘은 반동 종교개혁에 의하여 촉발된 훨씬
더 중요한 종교적 갱신을 지배했던 것으로 평가되며
반(anti) 인문주의적인 자세에 있어서 이 주의는 뒤를
돌아보는 고색창연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원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정신을 얻고자 하는 운동으로 얀센주의라는 말은
청교도적이라는 말과 가깝다고 평가된다.
이와 같은 정숙주의와 얀센주의의 오해에 의해서
관상은 보편적인 기도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다행이도
로마 가톨릭의 신비 신학은 1896년 소드로 수도원장의
『영성 생활의 정도』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관상의 흐름이
재생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이 책의 가르침의 근거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맥의
유지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들어와서 사적(私敵) 헌신행위,
발현, 사적 계시를 강조하는 부류들이 등장함으로써,
관상은 성인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나, 아주 소수인들이
하는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 흐름이
현대에 들어와서 뒤바뀌게 되었는데, 그것은 동양의 신비가
서구 기독교에 강력한 도전을 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위안을 교회 안에서 찾지 못하고,
기독교 밖의 동양의 신비에서 찾게 됨으로써 동양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 인도 등으로 가는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찾던 기독교 관상의 전통을 동양의 신비에서 찾았고,
이것으로 인해서 교회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크리스찬들의 요구에 대하여서 윌리엄 메닝거가
『무지의 구름』에 바탕을 두고 ‘구름의 기도’라는 기도의
방법을 제시했고, 이런 흐름이 윌리엄 메닝거, 바실,
토마스 키팅 등의 사람들에 의해서 ‘향심기도’라는
관상기도가 탄생하게 된다. 이 흐름을 통해서 그 동안
끊겨 있던 관상기도가 다시 현대에 시작되었고,
지금 이 시대에 활성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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