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관상과 성숙 8-외재적,내재적 관상

영성에 대한 생각들

by 지심 정경호 2007. 1. 3. 09:48

본문

반응형
사랑의 향기마을

외재적, 내재적 관상  # 외재적․내재적 관상     (1) 외재적 관상 외재적 관상이란, 하나님의 현존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시키는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관상생활의 첫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외적인 침묵을 의미한다. 이 외적인 침묵은 인간의 마음을 내적으로 고요하게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으며, 이것을 위해서 우선 적게 말하거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외적인 침묵이라고 한다. 이러한 외적침묵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첫째, 엄격한 침묵을 위해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둘째 생활 속에서 움직이고 일할 때 고요하고 온유하게 그리고 침묵이 가득 찬 분위기로 행해야 하며, 셋째, 하나님의 침묵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하고 소중한 시간을  찾아내어서 그러한 시간에 방해받지 않고 끊임없이 습관화 할 수 있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2) 내재적 관상 이러한 외재적 관상만이 침묵의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즉 ‘내재적 관상’ 다시 말해 ‘내적 침묵’이 없는 침묵은 엄밀한 의미에서 침묵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적인 침묵은 무엇인가? 내적인 침묵은 하나님께로 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러한 길이기에 ‘나’의 마음이 정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이 현상은 바로 ‘나를 비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하게 침묵이 아니라는 말은 진정한 침묵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움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희생’이고 믿음의 차원에서는 기쁨과 은총, 그리고 평화이기에 관상의 일치를 위해서는 이러한 내적인 침묵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내적인 침묵의 은총은 인간의 능력이나 스스로의 실천에 의해서 생기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의 차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은총의 선물을 인간이 얻기에는 인간 스스로가 너무나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야 하며, 이러한 침묵만이 오직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고, 침묵 속에서 발견되는 깊은 내적 기쁨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희생’ 혹은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관상기도를 침묵기도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는 분심(잡념)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관상기도는 자신을 비우는 것인데, 다만 관상기도는 기도 중에 있어지는 사색과 의지의 활동을 반복하는 것에 대하여 멈추게 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면, 침묵은 단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침묵(내재적 관상)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관상의 세계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 수 있다. 즉 내적 침묵은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과 관계를 끊고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 내적 자아를 텅 비게하고, 그래서 모든 영적 사물을 통과하게 하는 것,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영혼의 어둔 밤’에 이르는 영혼의 여행(soul's joumey)"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앞에서 토마스 키팅은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며, 그 나머지 모든 언어는 잘못된 번역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침묵은 자연스럽게 관상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3) 관상기도와 침묵. 침묵은 모든 정신 활동, 상상력, 지력, 언어 등의 모든 것에서 정지된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침묵이 어두운 밤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바로 관상기도를 한다는 의미로써 이해되는 것이다. 즉 관상을 향한 침묵은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려는 것으로 침묵과 관상을 하는 사람은 의지적으로 자신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려고 하며, 이것은 침묵 가운데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관상의 과정 중에 잘 드러나게 된다. 모든 종교의 수련이 거짓 자아가 있는 마음을 비우는 수련이라 할 수 있는데, 특별히 관상은 이러한 내적 고요 즉 거짓자아를 비우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관상은 침묵을 통해서 우리의 상상과 이성 등을 초월하게 되는 기도이기에  관상은 침묵이 필수적이며, 동시에 침묵은 영적 성장을 위해서 관상으로 이끌어져 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를 향한 침묵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묵과 어두움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무지의 구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언젠가 이 구름에 도달하여 내가 제안하듯이 그 안에서 살며 일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이 무지의 구름이 그대 머리 위에서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듯이 마땅히 그대 아래로 망각의 구름을 깔아서 그대와 온갖 피조물 사이를 가로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대가 내게 “내가 하나님만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하고 물을 터이나,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나도 모릅니다”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런 물음으로 내가 그대를 이끌고자 하는 바로 그 어둠, 바로 그 무지의 구름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다른 모든 것들을 온전히 알 수 있고, 또 그들에 관해 생각할 수도 있지만-그렇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까지도 말입니다.-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을 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과 개념으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어떤 영적 여정의 지점에 맞닥뜨리게 되면, 침묵하게 되는데, 이 침묵은 이렇게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영혼은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데 이것을 리차드 포스터는 “무언의 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무언의 기도”보다는 ‘묵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즉 침묵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기도를 허용하심으로써 묵상의 삶을 더욱더 깊게 해주는 것으로 침묵은 묵상의 필수조건이고, 이 묵상은 신비가들이 말하는 ‘알수 없음’이라고 칭하는 공(空, emptiness)과 무(無, nothinggness) 안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인데 이러한 요건들을 갖추어 주는 것이 바로 침묵인 것이다. 이러한 침묵이 묵상이라는 주의 집중을 통해서 관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관상과 묵상에 대한 고찰은 관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 하겠다.   4) 묵상, 명상, 관상 침묵이 ‘내적인 침묵(내재적 관상)’으로 발전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문제는 바로 묵상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묵상은 기본적으로 말씀을 입에서 머리로 기억되게 하며, 그 기억을 통해서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기도의 방법으로, 이것은 말씀에 대한 반추, 그리고 그 반추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묵상기도에서 성경은 첫 출발점이나 그러나 성경 공부하는 차원에서 행하는 것을 묵상이라 하지 않는다. 묵상은 바로 그 말씀을 내면화시키고 인격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묵상은 공부나 사색과 다른 것인데, 그 다른 것은 공부나 사색의 목적과 묵상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묵상은 두 가지의 목적성을 갖는데, 그것은 지적 목적성과 정감적, 실천적 목적성이다. 지적 목적성은 초자연적인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지성 또는 이성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살펴보면,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의 상태는 완벽하게 악과 선, 나쁜 것과 좋은 것, 그리고 좋은 것과 더 좋은 것들을 구별하는 완벽한 능력을 소유했으나, 범죄 후에는 이러한 밝혀줌의 기능이 어두워져서 은총의 빛이 아니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성으로는 묵상에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한계에 대하여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지’이다. 의지는 선(善)이 이성에 임한 은총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면, 그 받아들여진 선을 취함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으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이 의지도 원죄로 인해서 그 판단이 정확하지 않는 까닭에 선과 악의 정확한 구분이 모호해 지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가 의도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괄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마음속에서 자신의 사악함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가오는 깨달음인 묵상인 것이다. 이러한 은총의 다가옴은 성서의 낱말들을 스스로 분석하거나 추리하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선물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다가오게 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낱말이 낱말 자체로 다가오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쉐렌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가 말하는 것처럼 ‘성경의 동시대성’이라는, 즉 과거가 단순히 현재와 병행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말씀이 현재의 그 말씀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에 대하여 디트리히 본회퍼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분석하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말씀이 선포될 때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마리아처럼 성경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서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반응을 흔히 추리적 묵상이라고 부르는데, 이 추리적 묵상은 “초자연 진리가 지닌 의미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묵상의 특징은 추리적 형태의 묵상이고 따라서 주의(attention)는 절대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즉 묵상은 이같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과 영성 생활에 대한, 그리고 진리에 대한 논리적 추리행위로써, 묵상을 상상적 묵상, 교리적 묵상, 윤리적 묵상으로 그분 짓기도 한다. 특별히 상상적 묵상에서 상상은, 우리에게 무엇에 대하여 현재와 과거까지도 그려낼 수 있는 기능을 가졌는데, 이 상상이 작용하는 통로는 바로 ‘마음’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상상력도 또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통제되지 않으면 상상의 잡다한 것들, 즉 왜곡된 생각이나 영적 개념을 물질적 관계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어떤 환각들에 대하여 집착하여서 끊임없이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상은 바로 추리적 묵상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러한 추리적 묵상은 정감적 기도로 옮겨가게 되는데, 여기에서의 문제는 정감적 기도만으로 묵상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이성은 정적의 기도로써 옮겨지게 되지만, 그러나 의지는 정적의 기도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묵상에서 정감적 기도로 옮겨갈 때 중요한 점은 바로 추리적 묵상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와 같이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적 독서는 의지의 행위를 자극하게 되고, 이것은 바로 정감적 기도로 향하게 하는 은총의 도구로써 존재한다. 이렇게 묵상이 정감적 기도로 향하게 되면서 의지가 작용하게 되는데, 이 의지의 작용은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향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단순기도’라는 탁월한 관상의 기도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묵상은 이성과 의지로써 출발해서 마음에 담아지게 되며, 이 마음에서의 작용은 바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탐험하면서, 하나님과 합일을 향하게 되는 초월적인 은총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이 현상은 정감의 기도, 단순기도라는 틀의 ‘명상’으로 이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끌어짐의 흐름은 인간의 본성과도 연관되어 지는데,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은 묵상을 통해서 인간의 종교적인 성향, 즉 인간에게 무한히 열려 있는 어떤 궁극적인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초월성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본질 속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기초월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초월의 성향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게 하고, 이러한 벗어남을 통해서 인간은 그 내적인 세계가 더 넓어지고 이 넓어짐을 통해서 인간은 점점 더 일치를 향한 성장이 있게 된다. 이러한 묵상에서 일치를 향하는 기도를 ‘명상’이라 하는데, 묵상과 명상은 관상의 일치로 향하게 하는 기도의 방법에 속하게 된다.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의 경우는 묵상과 명상을 기독교 전통에 있어서 한 가지 기도의 서로 구별되는 면으로 이해하면서 “명상이란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성의 열매이고, 사랑으로 가득찬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며, 고요함과 마음의 깊은 평화 중에 갖는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사고와 체험의 혼합이다.”라고 말함으로 묵상에서 명상에로의 자연스런 이행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몰트만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묵상과 명상의 구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상은 무엇을 사랑하면서, 고난 받으면서, 또 참여하면서 갖는 지식이고 묵상은 이 명상에서 되는 사람 자신의 반성적 각성이다. 명상하는 사람은 자신을 자기의 명상의 대상 속에 몰입한다. 그는 관조하는데 집중한다. 그는 자신을 비울 뿐 아니라 그 대상이 그 사람 안에 잠겨 들어간다. 묵상에서는 그는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반성한다. 그는 자기 안에 일어난 변화를 의식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고 또 자기 자신을 떠나고 자신을 잊어버리게 된다. 명상에서 우리는 대상을 각성하게 된다. 묵상에서 대상이 반성과 결합하게 되고 우린 자신의 각성을 다시 일깨게 된다. 물론 묵상 없는 명상이란 없고 명상 없는 묵상은 없다. 명상은 무엇인가? 명상은 사람의 지적, 영신적 삶의 최고의 표현으로서, 생명의 원천의 실체를 인식함으로, 이성과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서 보다 깊은 이성과 믿음으로 만드는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깊은 지식이다. 명상은 어떤 의미로 죽음을 통해서 들어가는 세계로써, 여기에서 죽음은 보다 높은 생명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즉 이 죽음은 참다운 삶을 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은 다른 모든 형태의 직관과 체험 등을 어둔밤에 잠기게 함으로써 그 효력을 잃게 만들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죽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에 대하여 17세기의 작가들은 ‘습득된 관상’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기도의 단계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기도의 단계들을 통해서 관상이 추구하는 영적 성숙의 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