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관상과 성숙 19-성 안토니오

영성에 대한 생각들

by 지심 정경호 2007. 4. 23. 21:02

본문

반응형
사랑의 향기마을

수도원의 시작 / 성안토니오

관상과 성숙 19-성안토니오

# 성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보는 영적 성숙의 과정  

 

영적 성숙은 기도로부터 시작된다. 영적 성숙은 참된 기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 찾아오는

첫 번째 문제가 바로 죄의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

기도의 여정(성숙의 단계)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으로 기도의 여정의 부분에서의 죄의 파급되는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죄의 문제는 기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이성’의 문제를 건드리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죄를 지어

타락할 때에도 마음만큼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서

사고의 능력, 즉 이성의 타락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기도의 장애를 가져오는 것은 타락한 이성임을 생각할 때 루터의 이성에

대한 이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죄를 지은 이후에도 이성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것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성은 “마귀의 능력 아래 매여 있기”

때문에 타락한 만물이 받아야 할 저주를 면할 수는 없다. 이성은 하나님의

지식의 “능력”과 “복음”을 깨달을 때에만 육을 버리고 영을, 일을 버리고

신앙을, 율법을 버리고 복음을 택하게 된다.


이성은 분명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과 복음의

깨달음이 없는 이성은 영적 성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기도의 여정에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현대의 시대는 이러한 이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성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성의 사람들을 향하여

부르심의 초청을 하신다. 이성이 타락함으로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는

불행한 영혼들에게 초청하시는 부르심의 메시지는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고통 중 하나는 외로움으로써, 이 외로움의

고통은 현대사회에 자살의 원인, 알코올 중독과 마약 복용, 그리고 다양한

질병들, 심지어 교통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외로움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로움은 단지 고통의 원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은 타락한 이성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부르심의 초청이다. 물론 이성을 버리라는 것은 이성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타락한 이성이 회복된 이성으로 치유되어서 올바른 판단을 갖게 하는 부르심인 것이다.*** 이렇듯이

외로움은 기도의 세계로 초청하는 하나의 음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이 세상의 다른 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로움은 이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즉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의심으로 인해 더욱더

커져 가게 된다. ‘외로움’이라는 부르심의 싸인을 받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부르심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것은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책들과

육체적인 질병을 통해서 고생함과,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고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초청하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이성을 통하여 해결하려하지만

그것이 헛수고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통한 기도의 부르심에 어떤

응답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서 진정한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을 통해서 내면으로 가는 움직임이 있기

시작할 때 진정한 영적인 삶, 즉 영적 성숙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여정의

시작과 함께 영적인 민감성이 발달되고 이 민감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의

해방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도를 통한 영적 여정의 단계를 살펴보고자 할 때 가장 적절한 예로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중심으로 영적 성숙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살펴봄은 영적 성숙과 관상과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

Paul Tillich는 인간의 이성이 본질 상태에서 실존의 상태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타락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성의 타락은 이성으로 하여금 구원을 요청하게 하는데 구원은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계시를 틸리히는 ‘궁극적 계시’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식하는 이성을 ‘존재론적 이성’과 ‘기술적 이성’으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있다. 존재론적 이성은 logos의 이성이고 기술적 이성은 추론(reasoning)적 능력인데,

현대는 logos가 없는 기술적 이성이 발달된 시기로서, 현대의 이성을 틸리히는 인간의 본질과 이것을 결정하는

진리의 상실된 이성의 시대라 평가하면서 추론(reasoning)적 이성으로 너무 축소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존재론적 이성 안에 기술적 이성이 포함될 것을 주장하면서, 로고스의 이성은 주관적 이성,

즉 ‘자아가 파악되고 형성되는(grasped-and-shaping-self) 로고스 구조’와 객관적 이성,

즉 ‘세계가 파악되고 형성되는(grasped-and-shaping-world) 로고스 구조’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틸리히의 이성의 이해는 플라톤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 이성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은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고 명확히 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을 ‘이성의 깊이’로 이야기한다. 이것은

이성의 본질적 특징으로서, 인식적인 측면에서는 ‘진리 자체’를, 심미적 영역에서는 ‘사랑 자체’를,

법적 영역에서는 ‘의 자체’를, 공동체 영역에서는 ‘사랑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어떻게 타락한 이성이 본질적 이성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이다. 틸리히는 본질적 이성은 완전히

상실되거나 존재의 깊이로부터 완전히 결여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인간 이성이 유한하기에

무한한 근거를 파악하는 것에 무력함은 있지만, 이러한 무력함을 인식할 때 인간은 유한 속에 현존하는

무한함을 깨닫게 되며, 이것은 쿠자누스가 말한 ‘반대의 일치(coincidence of the opposite)'라고 말한다.

이런 무력함을 인식한 이성은 ’계시‘를 갈망하는데, 틸리히는 계시를 ’인간 지식에 대한 존재의 근거의 현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으로, 유한과 무한 사이의 유비(analogia entis)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식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 알려지는 지식의 과정 속에서 계시의 세 가지 표식이 있게 되는데,

첫째, 신비(mystery), 둘째, 황홀(ecstasy), 셋째 이적(miracle)이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서 타락한 이성은 계시에 붙잡히게 되고, 이것을 합일(일치)이라고 하며, 이 일치를 통해 이성은 회복된다.

본 소고에서는 이러한 계시의 깨달음을 일치로, 그리고 계시의 붙잡힘을 통해서 이성이 회복되는 과정 자체를 관상으로 보며,

그리므로 관상의 과정은 이성의 회복을 통한 영적 성숙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