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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상과 성숙 21-성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 본 영적 성숙의 단계

영성에 대한 생각들

by 지심 정경호 2007. 5. 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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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향기마을

수도원의 시작 / 성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 본 영적 성숙의 단계

관상과 성숙 21-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 본 영적 성숙의 단계

 

#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 본 영적 성숙의 단계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한 성숙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의례적인 전략’에 의하여 시험을 받는 단계로서, 안토니오가

시험을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산에 대한 유혹이었고,

두 번째는 친구와 친척들과의 기억으로 유혹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돈에 대한 집착, 네 번째는 권력에 대한 유혹

다섯 번째는 유명해지려는 유혹이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탐식의 기억들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사탄은 동생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넘어뜨리려 했다.

 

세 번째 단계는 플라토의 기간으로, 이러한 시간을 지내면서 안토니오는

자신이 미지의 세계로 불렸음을 더욱 강하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미지의

세계는 내면의 세계를 말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 안토니오는 자기 마을에서 좀 떨어진 무덤을 찾아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무덤은 그 당시의 상식으로 악마들이 들 끊는 곳이라고 믿어져 왔었고,

그곳에서 안토니오는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 앞에 맞서게 되었다.

 

다섯 번째로 안토니오는 악마의 힘이 집중해 있는 사막으로 가게 되고, 이곳에서

자아의 해방, 그리고 일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나는 영적 성숙의 단계들은 대부분의 영적

여정을 가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베네딕도는 이러한 단계들에

대하여 겸손의 12단계1)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겸손의 12단계는 인간이

변화되는 단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초기 1-4단계까지를 ‘인간의 의지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5-8단계는 ‘생각과 느낌’, 그리고 9-12단계에서는

‘육신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분류의 방식은 안토니오의 영적 성숙의 단계와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게 한다.

즉 안토니오의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는, ‘인간 의지의 변화’ 부분에

속할 수 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에서는 ‘생각과 느낌의 변화’에 해당하며,

다섯 번째 단계는 ‘육신의 변화’에 해당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권위자들이

주장하는 영적 성숙의 단계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부분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성숙의 과정들이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비슷한 단계들이 있지만 영혼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성숙의 단계가 순차적으로 밟아 가는 순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마다 각자 성숙의 과정이 다르나, 그러나 이러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부분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토니오의 영적 성숙의 단계를

겸손의 세 단계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이해되어지는 과정에 대하여

좀 더 살피기로 한다.

 

안토니오의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의지의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일어나는 첫 번째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어렸을 때부터 지니게 되었던

고집과 의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상처로부터의 자신을 방어하게 되는

‘자기방어’의 의지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인간에게 삶 속에서의

메마름을 가져다주게 되는데, 이러한 메마름, 즉 ‘어둔밤’은 인간의 영혼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세상 적인 것들에서부터 욕정까지 부정하여

끊어버림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이 밤은 하나님을 향하여 합일을 이루고자하는

영적 순례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느낌’의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다가오는 두 번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 안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으로, 생각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들로 채워지게 되고, 느낌은 영적지도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고 그 직면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의 정체를 알게 하며, 이 앎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발견케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러한 두 번째 단계에 대하여

“영혼이 하나님과의 합일로 가는 길, 즉 방법으로 보아 그런 것이니, 이는 믿음,

이성에게 어두운 것인 만큼, 밤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섯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육신의 변화’에서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세계에 깊이

거하게 됨으로 인하여 일치의 상태에서 인간의 육신 적인 모든 부분까지

(세포 하나 하나까지) 모두 변형되어 가는 과정으로서, 베네딕도는 심지어 사람의

거동과 용모 그리고 표정까지 또한 웃음소리까지 변화하게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단계에 들어간 영혼에 대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종착점인 하나님으로 보아

그런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더도 덜도 말고, 이승에 있는 영혼에게 어둔밤일 따름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토니오의 영적 성숙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눌 때 빠뜨리지 않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세 번째 단계에 속하는 ‘플라토’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성숙의 단계에서, 즉 한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중에 오는 평화와 위로의

시기로 볼 수 있는데, 성장의 상태는 아니지만, 성장하는데 힘의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플라토’의 체험을 포함하여 영적 성장을

이야기할 때 흔히 다음과 같은 도표가 이루어질 수 있다.


도표 1)

실존적 위기→자기포기→엑스타시 체험→영혼의 어둔밤→새로운 삶.


이것은 기독교 수련과정을 통해서 바라보는 인간의 영적 성숙의 단계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단계가 기독교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영적 성숙의 과정에 대하여 현대 심리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C.G.융이

제시하는 다음의 도표는 이러한 영적 성숙의 단계가 매우 보편적인 흐름임을

우리에게 입증하여 준다.


도표 2)

실존적 상태→자기포기(무의식의 작용)→누멘체험(자기체험)→심리적 팽창 위험성→인격의 변화.


이러한 두 도표에서의 진행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즉 기독교의 영성의

차원이나 심리학이 밝히는 인격성숙의 차원 모두가 다 인간의 내면의 중요성과 인간의

치유를 통한 변화가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두 도표가 무조건

일치한다는 것은 아니다.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러나 인간의 성숙의 문제에서만큼은

과학적인 접근이나 신학적인 접근 모두 비슷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에르나 반드 빙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의식과 종교에서 말하는 내면적인 삶과의 관계성은 깊다. 많은 종교 속에서

내면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내면적인 삶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기만 하면 내면적인 삶은 숨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내면적인 삶에 대한

추구는 순전히 지적인 추구로 되고 만다. 그때 사람들은

영적인 팽창(inflation spirituelle)을 느끼게 되거나, 내면적인 삶을 대신하고

있는 규칙이나 제의 및 형식으로 포장된 거짓 영성에 도달하고 만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의 단계와 심리학에서 말하는 과정이 비슷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성숙하고 싶어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로, 이것은 심지어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동물들 중에서도 하나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탈피’의 과정을

거치는 것들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성숙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주변 세계로부터

자신의 개성2)을 생각하게 되고, 이 생각은 영적인 여정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면서

‘새로운 존재’ 혹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성숙은 인간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성향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초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말은 초월에 대한 열망 즉, 인간의 원천과 기원, 곧 하나님이 우리가

성취하도록 의도하시는 그 존재에로 초월되고 싶어 하는 영적인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안토니오의 영적 성숙의 여정은 보편적인 성숙의 여정을 우리로 알게 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 성숙의 여정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존재’가

됨을 이야기하는데, 이 새로운 존재는 내적인 삶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3) 그리고

이 내적인 삶에도 무의식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적 성숙의 여정은 우리의 의식에 감추어져 있는 영혼을 발견하게 하고, 이 방들은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한 것4)처럼 관상의 일치를 향하여 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 성숙의 과정과 관상은 매우 밀접하며, 서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관상 기도를 통해서 오는 영적 성숙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성숙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성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과 영적 성숙은 떨어질 수 없는 문제이며, 이 문제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는 성숙이므로

가장 권장되어야 할 성숙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참다운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는 관상의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본 소고에서는 이 방법으로 두 가지의

관상 기도의 방법과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렉시오 디비나’와 ‘향심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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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베네딕도가 말한 겸손의 12단계를 야곱의 사다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12단계는 우리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식하도록 열어주시는 막다른 길로 인도해 간다. 그래서 야곱의 길을 방해했던

돌이 기념비로 사용되는 것 같이, 이 단계들은 관상으로 나아가게 하며, 내적 성장의 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12는 전체를 지칭하는 수로서 10과 같이 각 구성원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도 12지파로 이루어졌고,

예수의 사도들도 12로 구성되었다. 겸손의 단계들을 통해서 수도자는 형제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완전에 이르며,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2) 무의식에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있는데,  자아가 상처를 받거나 그 개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개인 무의식’이라는 곳에 저장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영적 성숙의 과정이

하나님의 은총속에서 시작되게 되면 바로 ‘개인무의식’에 대해 직면하게 되고 이것은 바로 개성의

인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3) 토마스 아 캠피스는 내적 삶에 관하여 “외적인 일을 경멸하고 내적인 일에 몰두하기를 배우라,

그리하면 그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새로운 삶은 바로 내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4) 내면의 영혼에 대하여 아빌라의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 영혼이 완벽하게

투명한 하나의 수정이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성 속에는 많은 방들이 있다.

더불어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밖에 다른 생각들은 별로 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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