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된 묵상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영적 자아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자아는 존재하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존재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사방에서 파멸의 위협을 받고, 허황된 행복을 속삭이는 위험한 약속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더러는 위협과 약속이 하나의 가치관 안에 동시에 담겨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지옥과 천국이 이 땅에 공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은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지옥과 천국이 점차 대중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대중이 공유할 내용이 서로의 천국이라기보다 서로의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이 은밀하게 품는 '천국'에 대한 갈망이 공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될 때면, 때로 그것이 만인의 지옥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문명이 가지고 있는 묘한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중 심리학자들과 종교 교사들은 이런 도덕적, 정서적 혼돈 상태에 혹시 위안이 될까 하여 서둘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내놓았습니다. 선의에서 한 일이지만 그들은 감상적 낙관론자들입니다. 그들은 내세는 제쳐두고, 오로지 이 땅에서의 문제만 해결하려 듭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이론에 우리가 감화 받고 고양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현실의 어두운 면만 본다고 나무랍니다. 가른 사람들의 눈은 가려놓은 채 자신들은 어딘가 밝은 면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그저 세상에서만 잘 지내면 되므로 고통과 슬픔은 아무 쓸모없고 온통 쾌락과 기쁨만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이 이러한데, 내가 건조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영적인 영역, 즉 묵상의 삶에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찾는 길이 결코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몹시 매정하고 정직하지 못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묵상의 길은 길이 아니며, 따라가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묵상의 추구는 과연 부질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차차 증명하고자 합니다. 다만 지금은 이 책의 취지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당장 처한 어려움에서 빠져 나오는 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이 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적 영역이나 묵상이라는 영역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약간의 확신을 다져주는 정도일 것입니다.
묵상 생활의 신기한 법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묵상이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저절로 풀릴 때까지 또는 삶이 풀어줄 때까지 문제를 자기 안에 품고 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허구적인 외적 자아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을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짓 자아가 해체될 때 문제의 해답도 선명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상 생활에 관한 또 하나의 법칙은, 묵상이나 행복을 얻으려고 마음먹고 묵상에 들어가면 둘 다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묵상도 행복도 먼저 버리지 않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묵상으로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는 거짓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적 자아, 즉 외적 자아의 활동에 가려진 잠자는 신비의 자아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자아는 존재하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존재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을 생각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타고난 통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분열된 존재를 재통합하여 통일된 인간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산만해진 자기 존재의 단편들을 다시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고 말할 때의 '나'가 진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의견과, 취향, 행위, 갈망, 희망, 두려운 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닌 '그들'의 생각입니다. 알 수 없는 어떤 집단이 우리의 얼굴을 빌려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나'는 누구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했을 때, 그분을 '당신'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나'는 아닙니다. 이 '나'에는 분명한 '당신'이 아예 없습니다. 심지어 타인조차 '나'의 연장(延長), '나'의 반영과 변형, 단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칫 '나'는 주체성을 잃은 채 객체의 세상에 침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나', 투사(投射)된 '나', 한시적 존재의 '나', 객체를 조작하여 소유하려는 '나'는 내면에 숨은 '나'와의 남남입니다. 후자는 투사도 없고, 묵상은 물론 아무것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하려고만 합니다. 제 뜻대로 계획하거나 성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법칙과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내적 자아란 누구도, 심지어 마귀라도 능히 속이거나 조작 할 수 없는 자아입니다. 그는 누가 있을 때는 절대 나타나지 않다가 사방이 평온해져 전혀 방해받지 않을 때에만 나오는 수줍음 많은 야생동물 같습니다. 누구도 무엇도 그를 꾈 수 없습니다. 그는 신적 자유 외에는 어떤 미끼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묵상의 능력 중에서....두란노-
[스크랩] 관상과 성숙 22-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0) | 2007.05.16 |
---|---|
[스크랩] 사랑 안에서 강건하게 하옵소서. (0) | 2007.05.14 |
[스크랩] 거룩한 독서 19-새 사람을 입으라 (0) | 2007.05.08 |
[스크랩] 관상과 성숙 21-성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 본 영적 성숙의 단계 (0) | 2007.05.07 |
[스크랩] 3-(29) 문체 (0) | 2007.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