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 Küng, Paradigm Change in Theology : A Proposal for Discussion (in: Paradigm Change in Theology, A Symposium for the Future, ed. by Hans Küng and David Tracy, trans., Margaret Köhl, Crossroad, New York 1989.)의 글 요약, 정리.
1. 안내
이 글은 튀빙엔과 시카고 대학의 신학교수들을 중심으로 열린 심포지움을 위해 한스 큉이 영어로 적은 글이다. 이 글은 신학의 패러다임 변화를 신학사 전체와 관련지어 서술하고 있다.
2. 내용요약 및 정리
한스 큉은 Tomas Kuhn,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와 함께 대화하면서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의 지금까지의 추이와 그 과정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큉에 의하면 신학사에서 새로움 novum의 범주는 종종 이단시되었거나 교회나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다(3). 그리하여 기존의 신학은 새로운 신학적 시도를 방어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들을 실행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큉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대화하면서 소위 '객관성'을 주장하는 과학분야에서 이 객관성 주장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자연과학 뿐 아니라 전체 학문이론에 근거가 되고 있는 해석학적 토대를 드러내려고 한다.
즉 "방법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은 반드시 상호관련성을 더 깊이 인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의 해석학에 몰두했던 게오르그 가다머와 같은 이들이 이해했던 바대로 모든 자연과학도 이해지평을 가지고 있으며 해석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5).
"심지어 자연 과학자들과 기술자의 결론조차도 해석학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대답들은 이미 대답이 기대되는 바로 점에 제한되어 있다"(5).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과 관련되어 있는 현대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결론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이 결론들은 다만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만 가치가 있으며 그 밖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5).
☞ 이 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론과 결과 사이를 매개하고 있는 "조건" 즉, 방법론적 매개에 대한 공략이다. 방법론에 따라 결과들이 달라진다고 한다면, 과학적 결과들을 비롯한 모든 학문적 이론의 결과들은 방법론에 절대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론을 구성하게 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사유구조"라는 언어적 형식을 사용한다. 어떤 사태를 "보고" "인식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사유의 구조가 크게는 동서양 사이에 차이를 두고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논리적, 학문적이란?>
큉은 칼 포퍼의 Logik der Forschung(1935) 이란 책을 소개한다. 이 책은 실증주의적 방법과 확신에 대해 공격을 담고 있다. 즉 1920대와 30년대 비엔나 서클을 이끌었던 모르츠 시릭과 루돌프 가르납, 그리고 젊은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에 반대하여 내세운 "세계의 과학적 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보편적 과학적 가정들의 실증적 정당화 positive verification of universal scientific propositions"을 칼 포퍼는 의문시했다(5-6). 칼 포퍼는 verification을 거부하고 falsification을 학문이론의 방법론적 축으로 삼았다.
포퍼는 학문은 계속적인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서 진리를 "소유 possession"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점진적으로 접근 approach해 간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큉은 과학은 분명 주관적이거나 비합리적 자산은 아니지만 과학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논리 logic가 적합한지를 되묻는다. 또한 과학의 진보가 부정당성 falsification의 원리를 따르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6.)
<해석학의 대두와 인지 패러다임의 전환>
이제 큉은 논리실증주의, 포퍼의 부정당성의 원리 다음으로 또 하나의 인지이론 theory of knowledge으로서 역사학적 해석학적 검토 historico-hermeneutical examination와 심리학적 사회학적 연구 psychologico-sociological investigation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어떤 이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서 사회적, 심리적, 역사적 "조건" 즉 "상황"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로써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 역사적 상황을 망각한 이론은 근거없는 사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큉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그것들은 (새로운 가정들이나 이론들) 패러다임의 변화 change (그러나 갑작스런 패러다임의 전이 switch 는 아니다!)로부터 이루어지는데, 완전히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또 완전히 비합리적이지도 않은 오랜 과정을 거친다. 이 변화는 종종 진화론적이라기 보다는 혁명적이다"(7).
"이것에 의해 내가 의미하는 바는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로 의미했던 바 그대로이다. 즉, 신념과 가치들, 기술들과 구성원들이나 기존 공동체에 의해 공유된 것들의 전체적 복합체이다." By this I mean what Kuhn meant by the term 'paradigm': 'an entire constellation of beliefs, values, techniques, and so on shared by the members or a given community' (Kuhn, p. 175)"
큉은 여기서 Stephen Toulmin의 Human Understanding, The Collective Use and Evolution of Concepts(Princeton 1972, 106)을 소개한다. 그의 책 서론에서 툴민은 "과학과 철학 모두에 동일하게 논리적 체계성을 가지고 있던 배타적인 선입견이 역사학적 이해와 합리적 비판에 의해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합리성은 개념이나 신념들을 거대한 형식적 구조 안에 둠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응답할 태세를 가짐으로써 표현한다. 물론 이 때 그들은 자신의 형식적 절차의 단점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넘어가고 있다."
☞ 다시금 강조되는 것은 이론 설립의 역사적 배경과 근거이다. 비엔나 학파의 이론은 반역사적 자기 충족적 이론일 뿐이다. 그런데, 인지이론의 역사학적 배경과 근거는 단순히 인지이론의 설립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이론의 정당화, 지속화, 적용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토마스 쿤과 툴민은 이 변화가 혁명적인지, 점진적인지를 논쟁한다.
"과학자나 신학자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사실이란 결코 벌거벗겨진 채로 있지 않으며, 경험 또한 결코 순수한 것 raw 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과 경험은 항상 주관적으로 배열되고 해석되어진 것이다"(10).
<자연과학과 신학의 유사점>
큉은 자연과학과 신학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다섯 가지로 나열한다(11 ff).
① 정상과학은 기존의 권위있는 텍스트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이미 설립된 패러다임을 대치하려고 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에 대해 저항한다.
과학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Physics, 프톨레미의 Almagest, 현대에는 뉴톤의 Principia 와 Opticks, 플랭클린의 Electricity, 라보아제르(Lavoisier)의 Chemistry, Lyell의 Geology 등등이다.
신학의 경우, 처음부터 신화적-제의적 신학과 철학적 신학의 구별이 이루어졌고, 원사도들의 증언과 교부들의 문헌이 중요시 되었다. 예를 들면, 이레니우스(2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서, 영지주의를 반박했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트레이시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의 신학은 '도전과 응전의 변증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 이 말은 신학형성이 단순히 이론 그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질문에 영향을 받으면 동시에 대답 또한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상호영향을 행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학텍스트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중세시대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이 때 신학은 대학의 학문이 된다.
동방의 체계화된 작품으로는 다마스커스의 요한 John Damascene이 기록한 Pegegnoseos (Fountain of Wisdom) 중 특히 제3부 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는 동방신학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다.
서방에서는 어거시틴의 신학(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13세기 중반까지 지배적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통주의신학(어거스틴)에 반대하는 근대주의자로 불리워졌고, 도미니카 수도회에 의해 파리에서 소환당하는 일도 있었다. 파리와 런던의 교회권력가들에 의해서 신(新)신학의 대표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의 Summa Theologiae는 오히려 그의 교단 밖의 추기경 카제탄 Cardinal Cajetan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방해하는 정상과학 norm science는 과거의 과학적 업적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verification의 방법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즉 정상과학은 그들의 모델을 위험하게 하는 falsification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13).
정상과학을 위험하게 하는 비정상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은 '평화의 방해꾼'이라는 도덕적 죄목으로 정죄를 당하게 된다.
② 둘째,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론적 발전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큉에 의하면 발전의 이념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위기"가, 즉 기존이론의 위기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14).
신학사에서도 과학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초대교회가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가 실현되지 않자, 그리스도가 시간의 끝이라는 유대 묵시문학적 모델은 누가의 문서에 의해 대치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시간의 중심이시다. 교회는 유대적 기원을 서서히 망각하고, 헬레니즘화 되고 제도화되어갔다. 이 때 다시금, 정체성의 문제가 위기로 다가온다. 즉, 역사적 기원을 철저히 망각하고 비역사적, 신화적 신학으로 움직였던 영지주의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는 그 대응책으로 다양한 신학모델이 등장했다(15).
2세기의 변증론자들의 신학, 이레니우스의 성서중심적 구원사 신학,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신학, 어거스틴의 신학 (어거스틴의 신학은 도나티스트의 위기와 펠라기우스의 위기에 대응책으로 전개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계시와 이성의 새로운 관계, 영적,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은총과 자연의 문제), 루터 (칭의론, 말씀과 신앙의 문제, 엄격하게 언어적 문법적 해석에 제한된 성서해석,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성서적 그리스도론 중심의 개념들 도입, 조직적이며 사변적인 스콜라주의의 위기에 대응), 계몽주의의 도래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비판적 신학 (성서해석의 문헌학적, 역사적 해석 강조. 개신교 정통주의의 위기에 대처.) 등이 등장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상과학 그 자체가 기존의 모델을 붕괴시키는데 무의식적으로 공헌하고 있다는 것은...역사의 아이러니이다"(18-19).
정상과학이 새로운 모델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불확실성의 전환기"가 있음을 큉은 주시한다.
③ 정상과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것은 단순히 이전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사용가능하게 될 때에서야 비로소 대체된다. 즉 옛 모델은 새로운 모델이 등장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20).
④ 새로운 모델의 등장에는 언제나 반대저항과 투쟁, 개인적 희생이 요구된다.
㉠ 새로운 모델의 등장과 옛 모델의 퇴장 사이의 기간에는 혼돈과 실존적 기반의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24).
㉡ 이 과정에서 실제로 비과학적인 요소가 또한 중요하다. 객관과 주관의 혼합,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들, 경력, 인간적인 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24).
㉢ 쿤이 주목하지 못한 부분인데, 이러한 과정에는 종교적 확신이 순수한 과학적 결정에 영향을 끼친다(24).
㉣ 새로운 이해의 모델은 또한 회심과 같은, 순수한 합리적 방식으로는 제거될 수 없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확실히 객관적인 근거를 확실하게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회심을 위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근거가 회심을 제거할 수는 없다.
☞ 큉은 여기서 반드시 합리적인 방법이 미래의 모델로 채택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모델의 전환에는 합리적인 절차 외에 "신앙의 결단"과 같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 새로운 모델은 젊은 옹호자들을 요구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들의 적대자들을 확신시키거나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적대자들이 점차적으로 죽고, 새로운 과학적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막스 플랑크, Scientific Autobiography, 33-34.).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신학의 공동체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과학적 요소 외의 것들 extra-scientific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모델로 전이되는 것은 순수하게 합리적으로만 수행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마치 회심 conversion과 같은 것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27).
⑤ 새로운 패러다임, 이해의 모델이 항상 지배적이 되는 것은 확실한가?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27-29).
㉠ 새로운 모델은 옛 모델에 흡수되어버린다. 이것은 아퀴나스 이후의 어거스틴주의, 루터이후의 토미즘의 상황이다. 어거스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념을 점차 흡수하여 아퀴나스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근대의 스코티즘에 흡수되어 버렸다.
㉡ 새로운 모델은 정상과학에 대항하여 지배적이 되고 옛 모델을 대체한다. "이단적인 혁신으로 시작된 것이 급속히 존경받는 전통이 된다"(28).
㉢ 새로운 모델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기존 모델로 인해 새로운 모델이 묵살되는 경우이다.
"신학공동체에서,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모델에 흡수될지, 그것을 대체할지 아니면 오랫동안 묵살될지 하는 것은 어렵게, 많은 논쟁 중에서만 예견될 수 있다. 그러나 새 모델이 받아진다면 혁신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된다"(28).
<패러다임 변화와 역사적 상대주의>
큉은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해 기독교 진리가 역사적 상대주의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 보다는 신학자들이 굉장한 주의를 모으고 있다고 지적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철처한 단절을 가져오는가? Does a paradigm change involve a total break?"(29). 이는 연속성의 문제 the question of continuity이다.
큉은 "모든 패러다임의 변화는 모든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토마스 쿤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것은 "다른 것과 관계되어 있는 새로운 체계 안에 여전히 있는 이전과 동일한 데이터 꾸러미"이다.
"뉴튼에서 아인슈타인까지의 메카니즘의 전회는 대상과 개념을 추가적으로 도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만 과학자들이 세계를 보는 개념적 네트워크을 대체했을 뿐이다"(Kuhn, 102).
"그가 무엇을 보든지 간에, 과학자들은 혁명 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세계를 보고 있다. 더욱이 그가 그것을 이전부터 다르게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와 실험 도구의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이전과 동일하다"(Kuhn, 129-130).
큉은 툴민의 주장- 패러다임의 전이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경쟁 패러다임조차도 완벽한 대안적 세계관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지적인 불연속성은 더 깊이, 방법론적 차원에 놓여있는 연속성을 숨기고 있다-에 동의하면서, 신학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극단적 연속성과 극단적 불연속성의 선택에 피해야만 한다"고 말한다(30).
<신학의 과제: 진리, 생명의 문제>
큉은 신학에서는 전통의 재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의 빛에서 전통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신학에서의 연속성의 문제는 자연과학분야보다 더 깊은 차원에 놓여있다. 토마스 쿤이 오랫동안 언급을 회피했던 단어 "진리"(Kuhn, 170), "생명의 진리"(Wittgenstein) 또는 생명의 문제가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큉은 토마스 쿤이 진리의 출처(Woher, whence)와 나아갈 방향(Wohin, whither)에 대해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세계와 인간의 출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결정적인 질문은 신뢰하는 신앙의 문제 a believing trust.... or a trusting belief"라고 한다.
큉은 신학이 학문으로서 다루어야할 대상에 적합한 방법과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한다.
<자연과학과 신학의 차이점>
"전형적으로 기독교 신학......그것의 전제와 대상은 기독교의 메시지이다. 즉 그것은 근원적으로 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교회공동체를 통해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왔고, 오늘날도 선포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의 모든 과학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은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역사성 historicity에 의해 특징지워져 있다"(32).
큉은 역사성이란 단어를 통해, 기독교 신학이 정초해야 할 역사적 토대를 강조하려고 한다. 즉 기독교 신학은 비역사적, 신화적 이야기, 전설에 기초하지 않으며, 또한 초역사적인 철학적 사변과도 구별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합리적인 해명이다"(32). 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동시에 인류를 위한 것이다.
This Jesus Christ is neither an unhistorical myth nor a superhistorical idea, doctrine or ideology. He is the historical man Jesus of Nasareth, who as the Christ of God is according to the New Testament writings the standard for believers of all time and of all Churches. The original testimony of faith of this Christ Jesus forms the basis of Christian theology (이 예수 그리스도는 비역사적 신화나 초역사적 이념이나 교리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약성서에 따라 모든 시대와 교회의 신자들의 기준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의 근원적인 증거가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 (32).
☞ 여기서 나는 한스 큉의 기독론 중심적인 신학정립과 더불어 그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 "기독교" Christian이라는 수식어에 주목을 집중하고자 한다. 그는 종래의 기독교 신학이 범해왔던 오류를 "기독교"라는 한정사를 통해 수정하고자 하고 있다. 종래의 기독교 신학은 자신의 이론을 모든 진리 중의 진리요, 유일한 진리로 생각하고서 자신의 이론을 단순히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서 시작된 "신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 신학의 한계 안에서 새롭게 설정하고자 한다. 여기에 기독교 신학의 가능성과 한계, 타종교와의 대화적 가능성과 공존모색의 가능성, 진리를 향한 공동노선의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스 큉은 "성서신학" 즉 정경의 범위 내에서의 신학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단순히 -자연과학처럼- 현재와 미래에 관계하는 것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 모든 역사적 학문 (세계문학사, 예술사, 철학사)처럼 전통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기원과 관련되어 있다"(related to the origins)(33).
"신학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 있는 원초적인 사건 primordial event과 뒤따라 계속되는 원초적 증언 testimony, 구약과 신약인 근원적 기록 the original record 을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원본 historical original 으로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항상 다시금 돌아가야할 곳으로 삼고 있다"(33).
☞ 이런 면에서 한스 큉은 전통을 중시하는 카톨릭보다는 성서와 초대교회의 신앙을 중시하는 개신교의 원리에 더욱 충실한 듯 하다.
Hans Küng, Paradigm Change in Theology : A Proposal for Discussion (in: Paradigm Change in Theology, A Symposium for the Future, ed. by Hans Küng and David Tracy, trans., Margaret Köhl, Crossroad, New York 1989.)의 글 요약, 정리.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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