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변하는 교회/교회의 형태는 변한다/

하나님의 사람들

by 지심 정경호 2007. 10. 10. 13:47

본문

반응형
변하는 교회

현대 교회의 과제

바야흐로 교회는 2,000년의 연륜을 향해 내닫고 있다.
교회가 속해 있는 세계는 이미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었다. 과학은 소우주와 대우주를, 原子와 萬有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통신,교통 수단이 더욱 신속,편리해졌고, 새로운 도구와 합성물질이 풍부히 등장했으며, 생산수단이 합리화되었고, 인간 수명이 십 년 이상이나 연장되었으며, 물리학,화학,생물학,의학,심리학,사회학,경제학,역사학 등 제분야가 놀랄 만큼 발전했다.... 어떻든 대체로 ㅡ 20세기의 운명인 이 세계적 격동과 위협 속에서도 - 역사는 줄곧 숨가쁜 전진을 계속해 왔다.
고도로 공업화된 구미인들은 온 세계에 지식을 보급했고,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은 잠을 깨었다. 바야흐로 세계는 단일경제,단일문명을 이루고 어쩌면 단일문화까지 발생할 듯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가? 교회에도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었는가? 어느 면에서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지 못하다. 어떻든 교회는 싫든 좋든 새로운 세계적 추세를 외면할 수 없으며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과도기란 으레 그렇거니와 우리 시대는 불안의 시대다. 과학과 기술의 개가에도 불구하고 예술,영화,연극,문학,철학은 인간의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체험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매 마찬가지다. 교회 역시 일견 항상 자신만만한 듯하나 같은 불안에 흔들리고 있다. 현대 세계의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 교회를 이루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좌절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되는, 오히려 건전하고 유익한 불안일 수도 있다. 심각한 위기처럼 보이는 것이 때로는 새로운 생활의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불길한 위협이 실상 발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변했고 변하고 있는 현대 세계의 일부요 바로 이 세계를 위한 존재인 현대 교회는 실로 거대한 과업들을 안고 있다: 전통과 형식에 매여 생기를 잃고 경화된 백성을 쇄신,규합,소생시켜야 하고, 한때 그리스도교화했다가 이제는 신앙을 버리고 교회와 교회의 메시지를 멀리하고 있는 지식인,노동자,농민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해야 하며, 갈라진 그리스도 신자들,그리스도 교회들의 재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즘을 추진해야 하고, 이슬람,불교,힌두교 등 비그리스도교와 더불어 세계통일의 전망 아래 허심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증진하며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고 대중을 교육하는 등 세계가 직면한 거창한 문제 해결에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

과제가 많은 그만큼 계기도 많다! 교회가 만일 주님이신 그리스도보다는 교회 자신의 이론과 편견에, 형식과 법규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면 문제에 대처할 수가 없고 문제 해결의 계기를 얻을 수도 없다. 주님의 포로가 된 교회만이 인류가 요구하고 열망하는 바를 꾸준히 충족시키려는 자세를 갖춘, 참으로 자유로운 교회다.

 

교회의 형태는 변한다

교회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주어진 각 시대의 교회 형태에 의존한다. 교회는 역사상 자화상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시대마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교회상이 있다. 역사상 특정한 교회의 생활과 형식이 있고, 역사상 특정한 신학자들이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교회관이 있다. 그러나 또한, 변화무쌍한 교회상의 온갖 정신사적,교회사적,신학사적 潮流와 逆潮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도 확실히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확고한 근원에서 나오는 근본 관점이요 근본 요소이며 "본질"이다.
이렇게 교회와 그 자기 이해의 역사에는 불변의 요소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하는 것 속에서만 나타난다. 그것은 다양한 변모 속의 동일성이요, 갖가지 사건 속의 연속성이며, 변하는 현상 속의 일관성이다.

요컨대 교회의 "본질"이 존재하되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 가능한 역사적 "형태"로만 나타난다. 이렇게 정태적,고정적이 아니고 동태적,현상적이면서도, 동시에 근원적 영속적인 "본질"이므로, 이런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야말로 계속 변하는 역사적 "형태"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일,영속,불변한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가변적,일시적인 것과 혼동히지 않기 위해서야말로 교회상이 내포하는 시간제약적 변화요소를 처음부터 고려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변하는 역사적 양상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교회를 파악할 수가 있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어떤 신학 이론상의 추상적인 天上의 이상적 교회가 아니고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있는 현실 교회다.
신약성서에서도 처음부터 어떤 교회론을 제시하고서 그것을 실현해 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현실에서 출발했고 그다음에야 이에 대하여 반성하게 되었다. 현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현상이요 사실이며 역사적 사건이다. 현실 교회의 현실의 본질은 역사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1) 본질과 형태는 불가분이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는 따로 나누어서 볼 것이 아니라 전체로 보아야 한다, 본질과 형태의 구별은 개념상의 구별이지 실제상의 구별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본질" 자체가 역사적 양상이라는 강물에서 채취되어 화학적으로 순수하게 증류되어 나온 일은 한 번도 없다.

변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은 깨끗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영속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절대로 개혁 불가능한 영역이란 없다.
본질과 형태의 관계는 단순히 씨와 껍질의 관계가 아니다. 형태 없는 본질은 꼴이 없으니 비실재요, 본질 없는 형태는 알맹이가 없으니 역시 비실재다.
역사적 형태가 상대적 현상이라고 해서 어딘가 그 "뒤에" 혹은 그 "위에" 존재하는 본질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저 해롭지 않은 신학이론((theologumena)이나 답습하여 역사적 판단이나 결단을 회피하려 함도 너무나 안이한 태도라면, 역으로 근원에서 비롯되는 교회의 본질을 무시하고 무비판적이며 나태한 정신으로 교회의 현존 형태에만 집착하여 외적 활동에만 분망하거나 전혀 수동적 역할만 하려 함 역시 안이한 태도다.

교회의 본질은 역사적 양상의 뒤에서나 위에서 보지 않고 그 안에서 볼 때 비로소 현실 교회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2) 본질과 형태는 같지 않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는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구별해야 한다. 본질과 형태의 구별은 개념적이기는 하나 필요하다.
이 구별 없이 어떻게 변하는 교회의 양상 속에서 항존하는 요소를 가려낼 수가 있는가. 또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적 양상을 판별할 수가 있는가. 역사적,경험적으로 나타난 교회 안에서 무엇이 바른 것인가를 어떻게 규명할 수가 있는가.

교회의 본질을 자신의 일부로 삼을 만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란 ㅡ 신약성서에도 ㅡ 없다.
교회의 본질을 완벽하게 철저히 반영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란 ㅡ 신약성서에도 ㅡ 없다.

불변하는 것은 아니나 영속하는 본질을 변하는 형태 속에서 식별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현실 교회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적 형태 안에서 보아야 하고, 역사적 형태는 언제나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출처:어둠 속에 갇힌 불꽃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