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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상과 성숙 32 / 관상의 한국교회 적용의 문제

영성에 대한 생각들

by 지심 정경호 2008. 5. 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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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상과 성숙 32/관상의 한국교회 적용의 문제

       

                                                       글 / 지붕과 쉼

      @ 관상의 한국교회 적용의 문제 @


       # 관상 기도의 필요성

        * 경건주의에 뿌리를 둔 통성 기도

      한국 개신교의 기도를 살펴보는 것이 관상의

      적용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으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통성기도와

      관상의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국교회의 출발선상에서 영적인 부흥운동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건은

      1907년에 일어난 평양부흥운동이었다.

      선교사들의 집회로 인해서 1904년 원산과

      1906년 평양과 목포 등의 각처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고, 이 불길은 계속 이어져서

      1907년 1월 6일 평양시에서 해마다

      사경회가 열리게 됨으로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이 평양 부흥운동에 대하여

      후대의 평가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평가로 나누이고 있다. 부정적인 면은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 시켰다는데 있고,

      긍정적인 측면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이

      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정립되었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부흥운동이 바로

      ‘경건주의적’인 운동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러한 경건주의의

      징으로 한국교회에는 첫째, 성경공부가

      있었고, 둘째, 신앙의 체험이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셋째, 수적인 성장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경건주의적인 특징의 신앙의

      출발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으나,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건주의적인

      신앙의 흐름은 퇴색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그것은 해방직후의 혼란과 교단의 분열,

      전쟁 속에서의 성령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극단적인 핍박과 함께 순교자들의

      순수한 신앙의 투쟁도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열광적이고

      종말론적인 신앙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 신앙은 철저하게 내세적이고 현실

      부정적이면서 축복을 받기 위한 기복적인

      신앙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 신앙은

      한국교회의 기도원 신앙이라는 형태를

      등장시켰고,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와 같은 양적성장이

      교회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양적

      성장의 흐름은 1990년대 이후 정체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사회의

      고도의 지식사회화, 그리고 기술사회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이 흐름 속에서 한국의

      통성기도는 교회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통성기도의 문제점이 시간이 가면서

      보여지게 되는데, 이 영성의 문제점은 첫째,

      지나친 감정에 호소한다는 점 둘째, 신앙의

      지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반지성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성향을 가져왔다는 점 셋째, 성화의

      삶이 강조되지 못했다는 점 넷째, 축복개념과

      기복개념이 혼합되었다는 점 다섯째, 성령체험을

      은사체험으로만 강조되었다는 점등을 들 수 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새벽기도’의 예를 보아도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새벽기도는 성도를 깨우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매우

      좋은 기도의 시간도 ‘샤머니즘적’인 기복적

      기도가 됨으로 인해서 체험과 축복에 집착하는

      현상의 흐름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문제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통성기도도 한몫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통성기도의 전통은 분명히 평양대부흥운동에

      둘 수 있다. 즉 통성기도의 운동은 경건주의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전통은 잊혀지게 되었고,

      지금은 통성기도하면 샤머니즘적인 기도로

      오해를 받고 있다. 이 통성기도의 본질을

      되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축복과

      체험에 집착하지 않는 기도의 회복이 필요하고,

      너무 지나치게 천국 문을 여는데 초점에 맞추는

      기도를 지양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통성기도에

      관상 기도의 ‘성화’ 또는 ‘정화’의 방식을 되살려서

      통성기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관상으로 향하게

      하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통성기도도 오랫동안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깊은 침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이 순간은 관상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 대하여 앞으로 깊은 연구가 되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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