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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호
샤마임수도원공동체 소식
샤마임수도원 공동체는 활동하는 관상기도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바른 영성의 확립과 보급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샬롬^^
목차
#01.샤마임 찬양소식
1)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2)여호와를 사랑하라
3)그는 나를 만졌네
4)길
#02. 샤마임 말씀의 창
1)질 오스틴
2)주기철 목사
3)수영로교회-맥추절을 지켜라
#03.감동 동영상
1)1번가의 기적
2)벅스라이프
3)포레스트 검프
#04)영성이야기
1)변종길-화란 개혁 교 회의 영성과 갱신
2)지붕과 쉼-관상과 성숙
3)바실 페닝턴-참자아, 거짓자아 / 서문/
#05)아름다운 시와 글
1)사랑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
2)내려놓음/평화의 사람
3)사랑/이해인
#06)클래식&국악&성화와 예술
1)구노/로미오와 줄리엣 1막 '꿈속에 살고 싶어라'
2)로맨스
3)다시보는 명 연주-필을 거쳐간 지휘자들
#07)샤마임 토론의 방
1)재미있는 만평
2)관상에 대한 오 해와 댓글
#08)주일학교 율동
각 교파별 여름성경학교 찬양,율동 자료 모음
#09) 책 이야기
1)엔도 슈사크의 "침묵"
#10)샤마임 칼럼
#01. 샤마임 찬양 소식
"~찬양과 함께"의 방에 실린 찬양 중에, 은혜로운 찬양 4곡을 소개합니다.
1)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바로가기)
2)여호와를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서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게 준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이웃에게
전하여라 그러면 네가 짓지 않은
큰 집을 주리라 네가 심지 않은
과실을 먹게 하리라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여호와를 사랑하라(바로가기)
3) 그는 나를 만졌네 / 윤복희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나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
그의 사랑 있으면 나 외롭지 않아
그의 사랑 안에서 나 두렵지 않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그는 나를 만졌네(바로가기)
4) 길
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길만이 옳은 길이란
믿음속에 아직은
멀기만한 승리의 길을
내게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만의 십자가를 지고
수많은 가능성과 나를 버리고 가는
주님가신 고독의 길 도대체
이길의 끝은 어딘지 정말로
이길의 끝이 있기나 한건지
쌓여가는 의심속에 지쳐버린
나의 믿음과 고통과 절망과
고독의 흐르는 눈물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요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
주님과 함께 있는 이 순간에
모든 걸 이길 수 있죠
도데체 주님은 어디 계신지 정말로
이길의 끝이 있기나 한건지 쌓여가는
의심속에 지쳐버린 나의 믿음
고통과 절망과 고독과 흐르는 눈물
난 믿어요 이젠 알 수 있어요
처음부터 함께 하셨던 주님과 함께
있는 이 순간에 모든 걸
이길 수 있죠
길(바로가기)
#02. 샤마임 말씀의 창
"~말씀의 창"의 방에 올라온 주목할 만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1) 행 2:1~4 ; 5:14~15 / 질 오스틴
질 오스틴(바로가기)
2)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원고
- "나의 5종목의 기원"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帝王), 장상(將相), 재사(才士), 가인(佳人)도 다 죽었고 성현(聖賢), 군자(君子), 위인(偉人), 걸사(傑士)도 다 북망산(北邙山)에 가 묻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 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만은, 주님을 버리고 천 년 살고 만 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설교 중간에 잠시 기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에게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소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발을 쾅 구르며)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24:14)고 신신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차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을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 끝없이 처절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이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저의 자식들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저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저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은 줄 압니다.
저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 주옵소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떨리는 목소리, 깊은 흐느낌,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회중.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도 슬금슬금 교회당 밖으로 나가버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께 짐 지울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위하고 또 그 교회와 그 의를 붙들고 "국궁진쇄 사이후이", 죽도록 충성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나라를 위해서 선죽교에다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시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은 시를 읊은 그의 충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우랴!
예수를 사랑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몸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흐느끼는 교우들을 바라보다가 찬송가 196장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피와 같이 붉은 죄/눈같이 희겠네……/(3절까지 부른 다음, 숨을 돌려 다시 설교)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384 장을 함께 부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방패와 병기 되시니……
3)맥추절을 지키라 (신 16:9-12) *수영로교회
맥추절을 지키라/수영로교회(원문보기)
#03. 감동의 동영상
샤마임 카페에 올라온 동영상 중에 함께 나눌 감동의 동영상을 소개합니다.
1)1번가의 기적(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에 참고할 만한 동영상)
2)벅스 라이프(성경학교나, 수련회에 참고할 만한 동영상)
3)포레스트 검프(감동이 있는 메시지^^)
#04. 영성이야기
샤마임과 함께 연구되고 공유되는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나누고자 합니다.
1)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 / 변종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본 자료는 http://www.kts.ac.kr/ 의 소유입니다.
2000. 8. 21. 사랑의 교회. 성경신학회 발표 논문.
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
- Gisbertus Voetius를 중심으로 -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I. 서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17세기의 푸치우스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푸치우스를 살펴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글들은 거의 다 라틴어로 쓰여졌으며, 이것마저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글들 중에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몇 편이 화란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가 화란에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그에 대한 소개나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이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의 경건에 대한 이해는 한국 교회에도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먼저 ‘영성’과 ‘개혁주의 영성’이 무엇인지 간단히 그 개념을 살펴본 후에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한다.
II. 영성
영성(靈性, 영: spirituality, 독: Spiritualitat, 화: spiritualiteit)이란 단어가 요즘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불어 spiritualite에서 온 것으로 카톨릭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개신교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단어의 개념은 아주 모호하다. 어쩌면 이 단어는 그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더욱 인기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1)
펠러마(W. H. Velema) 교수에 의하면 영성이란 원래 ‘어떤 특정한 형태의 영적 생활’(een bepaalde vorm van geestelijke leven)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기본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곧 영성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의 일에 헌신하는, 영혼의 특정한 태도’를 나타낸다.2) 그렇지만 그 구체적인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영성에 대한 실천적 사전」을 편찬한 크리스티안 쉬츠(Christian Schutz)에 의하면, 영성이란 단어를 어의적 의미 그대로, 곧 ‘영적인 생활 양식’(geistliche Lebensform)으로 보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영적인’(geistliche)이란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이 또 문제되기 때문이다.3) 이것은 ‘물질’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이 세상의 실재’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반대되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으며, 또 다른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영성’이란 단어는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에 의해서만 그 정확한 의미가 밝혀질 수 있을 따름이다. 많은 경우에 이 단어는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각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화란 개혁교회의 어떤 이들은 ‘영성’이란 단어 대신에 ‘개혁주의 구원 체험’(gereformeerde bevinding)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4) 우트레흐트 대학의 은퇴교수인 흐라플란트(C. Graafland)는, 이 ‘구원 체험’(bevinding)이란 단어는 ‘영성’(spiritualiteit)보다는 훨씬 분명한 개념이긴 하지만 영성을 ‘구원 체험’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본다.5) 영성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서 마음의 내적 구원 체험뿐만 아니라 성향이나 행동에 있어서 전체적인 삶의 분위기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사회 생활에서의 태도나 윤리적, 사회적 행동들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영성’(gereformeerde spiritualiteit)은 전체 개혁주의적 생활 방식(way of life)과 관계된다. 즉 전체 문화 생활과 관계된다.6)
그래서 흐라플란트 교수는 그 개념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영성’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펠러마 교수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단어가 대단히 모호하고 문제가 많은 용어이긴 하지만 이 단어가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도 워낙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개혁주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좀더 분명히 정의하는 입장을 취한다.
필자도 펠러마 교수의 견해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영성’이란 단어가 대단히 모호한 개념이며, 카톨릭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합당치 않은 용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오늘날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주의적’이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여서 ‘개혁주의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영성’이라는 용어보다 ‘경건’(pietas)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입장을 나타내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는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영성’과 비슷한 용어로 중세에 ‘헌신’(devotio)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은 ‘경건’(pietas)으로 대체하였다. ‘헌신’은 기도, 묵상,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 마음의 통일 등을 가리키는 총칭인데, 카톨릭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경건’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그 중심에 가지고 있다.7) 칼빈은 ‘하나님의 은덕을 알도록 일깨워 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묶어진 경외’를 경건이라고 불렀다.8) “경건은 우리를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며 참 거룩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것이다.”9)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경건’(pietas)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eusebeia’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경건’이라는 단어가 ‘영성’보다 개혁주의 영성을 나타내는 데 더 나은 단어라고 생각된다.
III. 개혁주의 영성
그렇다면 ‘개혁주의 영성’(gereformeerde spiritualiteit)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개혁주의적’(gereformeerde)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흐라플란트는 개혁주의의 의미를 종교개혁 신앙의 3대 ‘솔라’(sola)에서 찾는다. 곧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가 종교개혁 신앙의 특징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경건(gereformeerde vroomheid)은 첫째로 성경적 경건이다. 오직 성경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나오는 경건만이 참 경건이다. 그러나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개혁주의 경건은 성경에 근거하되, 그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들로 표현된 것을 존중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경건은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들과 개혁주의 전통을 토대로 한 경건을 의미한다고 본다.10)
한편 펠러마 교수는 ‘개혁주의 영성’을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자기 지식)을 가지고 정의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과 ‘이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영성의 주요 부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사람이 반응하는 것’(de reactie van mensen op wat God zegt omtrent Zichzelf en omtrent ons)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11)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펠러마 교수는 개혁주의의 핵심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2) 하나님의 계시, 3) 인간의 전적 타락(은혜의 절대적 필요), 4) 구원의 적용(성령론), 5) 그리스도의 재림 대망.12)
어떤 관점에서 보든 개혁주의 영성 또는 경건의 특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반응이다. 이것을 우리는 17세기가 나은 화란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푸치우스(Voetius)에게서 살펴보고자 한다.
IV. 푸치우스에 있어서의 경건
1. 푸치우스의 생애
기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13)는 1589년 3월 3일 화란의 허이스던(Heusd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빠울루스 푸트(Paulus Voet)는 국가에 봉사하다가 죽었는데, 허이스던 시(市)가 그의 아들을 교육시켜 주었다. 아들 푸치우스는 학생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읽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helluo librorum”(탐독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604년에 레이던(Leiden) 대학에 입학하여 유명한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siscus Gomarus) 밑에서 정통 신학을 배웠으며, 재학 시절 중에 알미니안 논쟁을 경험하였다.
7년간의 신학 공부 후 그가 플레이먼(Vlijmen)에서 목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확고한 반(反)알미니안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정통 신학을 옹호하며 도르트 총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1617년에 그는 출생지인 허이스던의 교회로 청빙받아 갔다. 그가 45세 되던 해인 1634년에 그는 갓 설립된 Illustre School(Utrecht 대학의 전신)의 신학 및 히브리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21일 그가 행한 취임 강연의 제목은 “학문과 결합되어야 하는 경건”(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이었다. 그는 1676년에 죽을 때까지 평생 이 목표를 위해 진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는 우트레흐트 대학과 화란 교회 및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4) 그는 강의 시간에 경건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였다. 그는 실천 신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묵상 훈련을 시켰으며, 기도에 대한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목회상담을 하는 법과 설교를 전달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15)
푸치우스는 당대의 신학생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교역자들의 방종과 도덕적 해이를 개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촉구하였다. 그는 화란 젤란트(Zeeland) 주 미들버르흐(Middelburg)의 목사였던 청교도주의자 빌럼 텔링크(Willem Teelinck)의 서적들을 좋아하였으며, 그와 연결된 영국 청교도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 후 화란에서 전개된 소위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더 나아가는 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의 중요한 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운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원리들이 교회와 사회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형식화된 17세기의 개혁교회에 종교개혁적인 생활을 실현하려는 몸부림이었다.16)
학문적으로 그는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판 꼬이(F. van Kooij)는 그를 ‘스콜라주의 학문의 일등급’(bij een geleerd scholastiek van den eersten rang)이며, ‘참 경건의 표본’(aller voorbeeld in ware godzaligheid)이며, ‘뼈와 골수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자’(Calvinist in merg en been)라고 불렀다.17) 그래서 그는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 먼저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다음 이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며, 그 다음에 자기의 주장을 제시하고 이것을 증명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2.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는 앞에서 말한 그의 “취임 강연”(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 1634년)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강연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것은 경건과 학문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경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행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19)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경건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학문적인 논문이라기보다도 경건을 강조하는 하나의 설교라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원래 청중들 앞에서 실제로 행해진 강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푸치우스가 무엇보다도 학생들, 특히 신학생들의 경건한 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그의 취임 강연 이전에 출판한 두 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경건의 능력의 모범”(Proeve vande Cracht der Godtsalicheyt)과 “선행의 참 실천에 대한 명상”(Eene Meditatie van de ware Practijcke der goede wercken)인데, 이 두 책은 162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한 권으로 묶어져 출판되었다.
1) 경건의 개념
경건(pietas, godzaligheid)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푸치우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경건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het door de liefde werkzame geloof)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경건의 핵심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성된다.20) 그리고 경건의 특징에 대해 그는 교부 키프리안21)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겸손, 믿음에 굳게 섬, 언어에 있어서의 조심성, 행동에 있어서의 의로움, 행함에 있어서의 자비, 생활에 있어서의 절제; 불의 행하는 것을 알지 아니하고 내가 받은 불의에 대해서는 참고 견딤, 형제들과 평화를 유지함,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함, 그를 아버지로 사랑함, 그를 하나님으로 경외함;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에 아무 것도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위에 아무 것도 두지 아니하는 것, 그의 사랑을 결코 떨어지지 않고 붙드는 것.”(Nederigheid in de omgang, standvastigheid in het geloof, bescheidenheid in woorden, rechtvaardigheid in daden, in de werken barmhartigheid, in levenswandel tucht; geen kennis hebben aan het bedrijven van onrecht, maar het haar aangedane [onrecht] verdragen; vrede houden met de broeders, God liefhebben van ganser harte, Hem beminnen als Vader, Hem vrezen als God; niets boven Christus stellen, omdat Hij ook niets boven ons gesteld heeft; zijn liefde onafscheidelijk aanhangen. …)”22)
이를 볼 때 ‘경건’이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합당한 행동들을 다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덕목들(겸손, 온유, 평화, 인내, 의로움 등)을 가리키지만,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절제)과 하나님에 대한 관계(하나님을 사랑함, 경외함)에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경건에 대한 넓은 이해는 17세기의 청교도들에게 보편화된 것이었다.23) 한편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경건’(pietas) 또는 ‘종교’(religio)로 보고 사람에 대한 것을 ‘의’(iustitia)로 보았다.24)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경건은 곧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구별이 정확하게 유지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threskeia)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약 1:27).
2) 은혜의 열매
푸치우스는 경건은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의 열매’(vrucht van Gods verkiezende genade)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도르트 신경의 가르침은 경건의 실천을 사라지게 한다는 어떤 이들25)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경건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옹호하였다. 은혜의 교리는 항상 참 경건의 능력이 된다. “경건은 주로 내적 능력의 문제이다. 참된 경건은 마음의 깊은 곳에 심겨져 있다. … 능력 있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는 어떤 표면적인 행동도 다 죄들에 불과하다. 이성의 조명, 참되고 견고한 믿음, 그리고 정직한 회개는 경건의 요소들이다.”26)
그리고 나서 그는 경건의 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경건의 실천의 첫째 요소인 ‘순수한 교리’는 건전한 지식을 통해 생각을 조명한다. 이 건전한 지식은 영적인 지혜를 주며, 동시에 판단을 지도하며, 감정을 통해 양심을 성결케 하며, 체험을 통해 기억을 강화한다. 2) 두 번째 요소는 ‘믿음’인데, 이것은 신뢰와 확신을 가져다 주며, 이것에서부터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위로가 나온다. 3) 세 번째 요소는 ‘삶의 회개, 새로운 순종’인데, 이에서 참 경건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이 세 요소는 서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27)
푸치우스는 그의 우트레흐트 대학 강의 중에서 경건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vrucht van Gods genade, die het hart verandert)라고 하였다.28) 그는 도르트 총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모든 경건의 원리로서 ‘중생’(wedergeboorte)을 강조하였다.29) 그러나 푸치우스는 중생 시에 사람에게 일어나는 ‘체험’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의 ‘중생의 열매’에 더 강조점을 둔다.30) 왜냐하면 중생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31) 이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그리고 그 안에서 감정의 평화가 보장되는 ‘안전한 울타리’(veilige omheining)이다.32)
3) 정확성
푸치우스는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정확성’(praecisitas)을 강조했다. 그는 중립과 관용이라는 구실 아래 행동에 있어서 정확성을 기하지 않는 자들을 ‘니고데모주의자들’(Nicodemisten), ‘중립주의자들’(Neutralisten), ‘어중간한 자들’(Onderen-tusschenaers), ‘정치적 신학자들’(Politique Theologanten)이라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33) 이들은 아마도 그가 그의 취임강연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자유방임주의’(libertinisme), ‘쾌락주의’(epicurisme), ‘부주의’(zorgeloosheid), ‘방탕함’(losbandigheid)34)과 동일한 부류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성’이란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의 법에 정확하게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을 뜻한다.35) 이 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으며, 참된 신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지켜지고 있다.36) 푸치우스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정확성을 가지고 정직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성경은 이에 대한 유일한 표준이다.37) 푸치우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확성과 단순성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밀성으로 인하여 경건과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이다”(Praecisitas et singularitas est modus a pietate inseparabilis, propter divina legis akribodikaion).38) 만일 계명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지킴에 있어서 조심성 없이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정확성’의 ‘효과적인 제일원인’(prima causa efficiens)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유일한 표준이다.39)
이상에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경건에 있어서 핵심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경건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후의 참된 개혁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삶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물론 푸치우스에게 있어서의 ‘정확성’은 자칫하면 율법주의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40)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이것을 엄밀하게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개혁교회의 경건의 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경건의 실천
경건은 ‘실천’(praktijk)과 관계된다. 그래서 푸치우스는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 또는 exercitia pietatis)을 학문적으로 강조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하였다. 오히려 그의 경건에 대한 모든 강조는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르게는 아스케티카’(asketika)라고도 불렀는데,41) 1664년에 출판된 그의 책 제목(Ta Asketika sive Exercitia pietatis)이 또한 이것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 ‘아스케티카’란 말의 의미는 오늘날의 ‘금욕’이란 것과 전혀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아스케티카’는 ‘경건의 실천들에 대한 방법과 서술을 포함하는 신학 분과’(pars theologiae quae continet methodum ac descriptionem exercitiorum pietatis)를 의미한다.42)
푸치우스는 그의 취임강연에서 학생들, 특히 신학생들의 방종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 “학생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경건과 헌신의 훈련이 없이, 덕을 뿌리거나 거둠이 없이, 세상의 자녀들로서 세상을 위해 부름받아 세상에 굴복하고, 육신과 헛된 것을 섬긴다면 … 이 얼마나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우며 눈물의 바다로 탄식해야만 할 것인가!”43) 그래서 그는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배운 자들 곧 잘못된 자들”(de geleerden - de verkeerden!)이라는 말이 영원히 묻혀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다.44) 그는 또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 나오는 탄식을 인용하고 있다: “보라. 배우지 못한 자들은 일어나서 천국을 취하지만 우리는 혈과 육에 속한 논쟁들 가운데 방황하고 있구나.”45)
푸치우스는 먼저 법학도들, 의학도들, 철학도들, 비평가들, 시인들, 논리학자들, 역사․고고학도들에게 그들의 모든 학문을 경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것을 촉구한 후에 ‘신학도들’(신학생과 신학교수들)에게 경건한 생활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는 신학을 천상적인 철학, 신적인 법, 영적인 의학, 거룩한 글들, 가장 오래되고 정통한 역사, 숭고한 웅변이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신학에 종사하는 신학도들을 ‘기초인 동시에 정상’이며, ‘총합과 완전’이며, ‘모든 공부와 학생들의 규칙과 기준’이며,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46) 그러면서 그는 땅에 떨어진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비노니, 우리의 이름과 지위를 수욕과 더욱 악화되어 가는 오명에서 해방시키시오. 경건한 학문(godzalige geleerdheid)과 학적인 경건(geleerde godzaligheid)을 증명해 보이시오.”47) 그리고 그는 또한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설교는 정통이지만 행위는 이단인 자들이 많다. 이단들이 나쁜 가르침을 통해 행했던 것을 오늘날에는 나쁜 모범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다. 곧 그들은 백성을 미혹하며 잘못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들은 이단들보다 더 위험한데, 이는 행위가 말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48) 그러면서 푸치우스는 당대의 성직자들의 타락상을 당대 민중의 말들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곧 “평신도의 신앙이 최고다” 또는 “목사는 게으르다” 또는 “수도승의 배는 박커스의 잔이다”는 말들이 그것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마귀는 성직자들에게 세 딸을 주었는데, 곧 교만(trotsheid)과 탐식(vraatzucht)과 탐욕(gierigheid)이다.”49)
그러면서 성직을 바라는 ‘선지자의 아들들’(신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청년의 정욕, 부도덕한 자극들, 세상의 유혹, 화려한 식탁과 여관에 자주 나타나는 것, 밤낮으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고 삼키는 것, 합당치 못한 춤,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모든 힘을 다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귀중한 공부 시간을 빼앗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50)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종교51)를 위해 애쓰고 다른 사람에게 경건을 강요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경건의 맛을 한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여러분과 나와 모든 신학자들에게 화가 있을찌로다.”52)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외적(ad extra), 내적(ad intra) 사역에 대해, 그리고 위격들의 삼위일체와 그러한 신비들에 대해 세밀하게 논의하면서도 막상 우리에게 참 겸손이 없고,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죄에 대한 정의들과 구별들을 논하면서도 죄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53)
그래서 푸치우스는 우리가 날마다 성경 읽기와 기도와 묵상과 회개와 믿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치자고 권면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레고리의 말을 표어로 내세우면서 이것이 없이는 하루가 지나가지 말게 하자고 한다. 곧 “우리가 취하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 최선의 질서는, 우리가 말하든지 행하든지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 안에서 마치는 것이다.”54)
5) 요약
이제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아뻘도른의 스뻬이꺼(W. van 't Spijker) 교수가 이것을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푸치우스의 경건(pietas)에 대한 이해는 은혜의 우선성으로부터 출발하며, 중생에서 일정한 상태(habitus)를 가지게 하며, 거기서부터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나온다. 경건은 전체 삶의 성화를 포함한다. 여기에 율법이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정확성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 경건의 실천은 따라서 전체 삶의 성화를 지향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참된 헌신을 위해 훈련되어질 수 있는 정서적 생활의 내면성에도 강조점을 둔다. 이 둘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경건의 본질에 속한다.”55)
V. 평가와 교훈
이상에서 우리는 17세기 화란의 개혁신학자인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지난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열정이 식어지고 신앙생활이 형식화되어 가던 시대에 살았던 그가 그 시대 교회의 실상을 정확히 보고 모든 삶과 학문에 있어서 ‘경건’을 강조하고 실천했다는 것은 화란 개혁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선교 1 세기를 지나면서 한국 교회는 외형적 성장과 사업의 부요를 자랑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고 참된 경건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예수 믿어라”고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평신도들, “교회를 부흥시켜라”고 강요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교역자들, 안일한 성공을 바라면서 받기만 좋아하고 줄 줄 모르는 신학생들, 그리고 자기의 지적 실력을 자랑하기에 급급하면서 경건을 등한히 하고 조롱하는 신학자들이 편만해 있는 현금의 한국 교회의 상황은 360여년전의 화란 개혁교회의 모습보다 훨씬 더 열악한 형편에 처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360여년전에 우트레흐트에서 외쳤던 푸치우스의 호소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절박한 외침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푸치우스의 견해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1)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영성’ 주장자들 중에는 성경과 관계없는 영성 또는 성경에서 떠난 영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56) 이러한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생각해 볼 때,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를 가감 없이 그대로 다 인정하고서 그것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고 그 하나님의 법을 엄밀하게 지키려고 한 푸치우스의 경건은 성경적인 참 경건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궁극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학문적’이라는 미명 아래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고 비평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참 경건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2) 이와 같은 맥락에서 푸치우스가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가운데서 경건을 강조했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푸치우스는 잘 알려진 대로 정통신학의 옹호자이며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고마루스(F. Gomarus) 밑에서 정통신학을 배웠으며, 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도르트 총회에 소속 노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단지 그들의 신학 이론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평생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하며 도르트의 결정을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후에 요하네스 꼭께이우스(Johannes Coccejus)가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이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옹호하였다. 또한 철학자 데까르트(Descartes)가 화란에 들어와 머물면서 그의 회의론적 방법으로 개혁교회를 혼란케 할 때 이에 대항해서 전통적인 신학을 파수하려고 노력하였다.57) 이처럼 푸치우스는 종교개혁의 귀중한 유산인 전통적인 교리와 신학을 그대로 파수하는 가운데 경건을 추구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즈음 영성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전통적인 교리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58) 그러나 이러한 교리의 희생 위에 구축한 영성은 올바른 토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참 경건과는 관계없는 이상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3) 푸치우스는 경건을 하나의 신학 이론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실제 생활을 강조하고 스스로 힘썼다는 데 또한 큰 의미가 있다. 판 데르 린더(S. van der Linde)는 이것이야말로 개혁주의 전통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았다.59) 개혁주의의 특징은 주지주의나 신비주의가 아니라 경건의 실천에 있었다. 만일 개혁주의 경건에 대해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이론을 정립했다 할지라도 구체적인 경건의 실천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기도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해서 좋은 글들을 써낸다 할지라도 막상 자기 자신은 기도 생활을 등한히 하거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면, 그 모든 연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로 필자가 화란에 유학하고 있을 때 기도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묶어서 편집한 한 책60)을 발견하고서 그 학적 연구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 기고자들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인상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비록 영성이나 경건에 대해 강조하고 연구를 한다 할지라도 막상 경건의 실천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심지어는 그런 실천적인 경건을 내심 조롱하는 경향마저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학문적으로 경건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평생을 그렇게 살았던 17세기의 푸치우스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경종과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푸치우스가 경건의 영역을 단지 내적 체험에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전체 삶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도 대단히 의미 있다. 물론 이것은 개혁교회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경건주의자들이나 오늘날 영성이나 경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개 개인의 내적 체험이나 감정에 치우치고 있는 것을 볼 때61)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푸치우스는 물론 개인의 내적 상태인 겸손, 온유, 절제 등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경건이 단지 이런 내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전체 삶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푸치우스의 경건은 후기 영국의 청교도들이나 후기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내적 체험 또는 감정적 체험에 치우치는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푸치우스에 있어서의 경건은 개인의 삶의 한 구석으로 후퇴하지 아니하고 전체 삶의 영역에서 경건을 실천하는 성경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약 1:27 참조). 이것은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학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법학, 의학, 철학, 비평, 시, 논리학, 역사와 고고학 등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경건함으로 학문에 임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푸치우스의 경건은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계속 이어져서 19세기말과 20세기에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지기만 하지만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62)과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63)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화란 개혁교회의 한 중요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64)
VI. 아쉬움과 바람
물론 푸치우스의 경건 이해에 있어서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함은 있을 수 없으며 한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치우침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정확성’의 개념은 자칫하면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따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충대충’ 하거나 ‘적당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정확성’은 올바른 태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매사에 정확성을 강조할 때 자칫하면 관용(빌 4:6)과 사랑(골 3:14)을 등한히 하기 쉽고 남을 정죄하는 잘못(롬 14:14)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서 범하기 쉬운 일반적 개연성을 말하는 것일 따름이며, 푸치우스가 정말로 그러한 잘못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푸치우스의 ‘스콜라주의적 방법’(scholastic method)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매사에 모든 문제를 너무 분석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어떤 것이 문제로 대두될 때에는 그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보고 그 잘잘못을 분석 평가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이것 자체를 나무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푸치우스의 이런 학문적 방법을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비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겸손하에 그에게 주어진 이성(理性)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성은 도구였을 뿐 경건이 우선이었다. 따라서 그가 어떤 주제를 세밀하게 따지고 분석했다고 해서 주지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의 논증들이 과연 성경에 부합한가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성경에 근거한 합당한 논증이라고 믿지만, 혹 어떤 경우에 있어서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완전한 신학자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좀더 엄밀한 주석에 근거한 신학 작업을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기도’에 관한 것이다. 물론 푸치우스 자신은 기도에 대해 강조하고 실제로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 후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기도에 대한 강조가 말씀에 대한 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개혁교회 성도들은 성경 읽기 전후에 기도하고 취침 전과 취침 후에 간단히 기도하는 전통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와 같은 강력한 기도 운동을 체험하지는 못하였다. 곧 개혁교회의 기도는 개인적 기도가 거의 대부분이며 단체적인 기도는 매우 희소하다. 물론 19세기 이후에 일부 경건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도회’ 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개혁교회 전체를 두고 볼 때 한국 교회에서와 같이 일반화된 기도회 모임은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칠 때 그들은 개혁주의의 정통 교리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속화를 막을 힘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로 ‘교회 이탈’(kerkverlating), ‘탈기독교화’(ontkerstening), ‘신 일식’(Godsverduistering),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elijke periode) 등의 말들을 하면서도 무너져 가는 개혁교회를 다시 세우지는 못했던 것이다. 혹자는 ‘은사 운동’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지만,65) 이것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VII. 결론
결론적으로 필자가 보기에 현재 개혁교회가 활력을 되찾는 데 가장 중요한 지름길은 ‘기도회’를 조직하고 기도를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눅 11:13). 물론 이러한 기도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기초한 전통적인 교리를 붙드는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66)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진리와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기초한 교리들을 붙는 것은 참된 영성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7세기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요 목사였던 푸치우스의 경건은 오늘날에도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에 미국의 프린스턴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에올루스하프’(Aeolusharp)를 잘 준비해서 거룩한 시온의 창가에 놓아둔 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때까지 그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것이다.67)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무장한 후에 열심히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있을 것이며 참 경건이 실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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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성’이란 단어의 개념의 대중성과 모호성에 대해서는 W. H. Velema, Nieuw zicht op gereformeerde spiritualiteit, Kampen 1990, 제 1장을 보라.
2) Velema, Gereformeerde spiritualitieit, 26.
3) Chr. Schutz, “Spiritualitat”, in: Praktisches Lexikon der Spiritualitat, Freiburg 1988, 1170f.
4) G. Dekkers en J. Peters, Gereformeerden in meervoud. Een onderzoek naar levensbeschouwing en waarden van de verschillende gereformeerde stromingen, Kampen 1989, 56ff.). 여기서 ‘bevinding’이란 화란어는 번역하기 매우 어려운 단어로서 화란 개혁교회의 영성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이것은 우리말의 ‘체험’보다는 넓은 개념인데,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인간에게 발견되는 ‘반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5) C. Graafland, Gereformeerden op zoek naar God, derde druk, Kampen 1991, 96.
6) Graafland, Gereformeerden op zoek naar God, 10.
7) Cf. W. van 't Spijker, “Invloed van de Moderne Devotie in de reformatie te Straatsburg?”, in: P. Bange e. a. (red.), De doorwerking van de Moderne Devotie, Windesheim 1387-1987, Hilversum 1988, 135-149.
8) Calvin, Inst. I,ii,1.
9) Calvin, Inst. III,vii,3.
10) Graafland, Gereformeerden op zoek naar God, 98f.
11) Velema, Gereformeerde spiritualiteit, 81.
12) Velema, Gereformeerde spiritualiteit, 82f.
13) 먼저 Voetius의 발음에 대해 잠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보에티우스’라고 많이 발음하고 있지만, 화란 현지에서는 모두 다 ‘푸치우스’라고 발음한다. 그 이유는 Voetius의 원래 성(姓)은 Voet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Paulus Voet이었음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Voet는 독일어의 Fuß, 영어의 foot와 같은 의미인 ‘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Voet란 성을 라틴어화한 것이 Voetius이다. 그 당시에 책을 쓸 때에는 다 라틴어로 섰기 때문에 저자명이 Voetius로 표기되고, 그 후로 그렇게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이름은 Paulus Voetius였다. 이처럼 Voet를 라틴어화한 것이 Voetius이기 때문에 ‘푸티우스’ 또는 ‘푸치우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14) Voetius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위해서는 J. Lindeboom, Geschiedenis van De Hervorming en de Hervormde Kerk der Nederlanden, vierde druk, Utrecht 1933, 353-355를 보라.
15) W. van 't Spijker, “Voetius practicus”, De onbekende Voetius. Voordrachten wetenschappelijk symposium Utrecht 3 maart 1989, onder redacite van J. van Oort e. a., Kampen 1989, 249.
16) Cf. A. de Groot, “Woord Vooraf”, in: Gisbertus Voetius. Inaugurele rede over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Kampen 1978, 10.
17) F. van Kooij, Geschiedenis der Christelijke Kerk, tweede druk, Utrecht, 1882, 417.
17) F. van Kooij, Geschiedenis der Christelijke Kerk, tweede druk, Utrecht, 1882, 417.
18) 이 강연은 1634년 Utrecht에서 “Illustris Gymnasii Ultrajectini inauguratio”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그의 유명한 책 TA ASKETIKA sive Excercitia pietatis in usum Juventutis Academicae nunc edita. Addita est, ob materiae affinitatem, Oratio 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 Gorcum 1664에 수록되었다. 화란어 번역과 서론, 해설이 첨부된 원래의 라틴어 본문은 근래에 Aart de Groot에 의해 다시 출판되었다: Gisbertus Voetius. Inaugurele rede over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Kampen 1978. Voetius의 취임강연에 대해 필자는 주로 A. de Groot가 편집한 책을 참고하였다.
19) 경건과 학문의 결합이라는 이 정신은 1894년에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Apeldoorn 소재 ‘기독개혁신학대학’(Theologische Universiteit van De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의 암묵적인 설립 이념이며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1997년 1월 14일 이 신학대학에서 은퇴한 W. van 't Spijker 교수의 은퇴 기념 강연의 제목도 또한 “푸치우스에 있어서의 경건과 학문”(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이었다. 이 은퇴 기념 강연은 1998년 Apeldoornse Studies no. 37로 출판되었다. 필자는 Spijker 교수의 이 은퇴기념 강연을 직접 참석하여 들을 기회를 가졌으며, 이 논문에서 그의 이 출판된 강연을 많이 참고하였다.
20)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31.
21) Cyprianus, De oratione dominica XV (MPL IV, col. 529).
22)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31.
23) De Groot, “Woord vooraf”, 11f.
24) Calvin, Inst. II,viii,8; III,7,3. Cf. De Groot, “Woord vooraf”, 11.
25) 그 대표자는 알미니안주의자인 Daniel Tilenus(1561-1633)이었다.
26) Voetius, Proeve, 10f. (cf.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2).
27) Voetius, Proeve, 12 (cf.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3).
28)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4.
29) Voetius, Disputationes selectae II,432-468.
30) Van 't Spijker, “Voetius practicus”, 247f.
31)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4.
32)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4f.
33) Voetius, Meditatie, 8 (cf.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3).
34)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29.
35) Voetius, Disp. sel. III,61; V,706-708. Cf. De Groot, “Woord vooraf”, 12.
36) De Groot는 이것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으로 생겨나는 ‘믿음의 순종’(geloofsgehoorzaamheid)이라고 부른다(“Woord vooraf”, 12f.)
37) Cf.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4.
38) Voetius, Disp. sel., V,706.
39) Cf. Van 't Spijker, “Voetius practicus”, 248.
40) 예를 들면 푸치우스는 각자 자기의 죄를 ‘참회 노트’에 적을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연습들은 율법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건의 실천’에 속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Cf. De Groot, “Woord vooraf”, 13.
41) 푸치우스는 모든 신학은 ‘실천적’이라고 보았지만,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의 ‘실천 신학’(theologia practica)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천 신학’을 theologia moralis, theologia ascetica, politica ecclesiastica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exercitia pietatis 또는 praxis devotionis로 불리기도 한 theologia ascetica는 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기도 부분을 다루었다. Cf. Van 't Spijker, “Voetius practicus”, 244f.
42) Ta Asketika, 제 1장. 또한 푸치우스는 ‘경건의 실천’(exercitia pietatis)을 ‘헌신의 실천’(praxis devotionis)으로 부르기도 했다(Disp. sel. III,2s; cf.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5).
43)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35.
44)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35.
45)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37 (Augustinus, Confessiones, VIII,8,19).
46)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3.
47)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7.
48)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7 (Bernardus, Sermo ad pastores in synodo congregatos).
49)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7.
50)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9.
51) ‘하나님을 섬기는 것’(godsdienst)이란 의미임.
52)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9.
53)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59.
54) Voetius, Godzaligheid te verbinden met de wetenschap, 73 (Gregorius of Nazianzus, Orationes II).
55) Van 't Spijker, Vroomheid en wetenschap bij Voetius, 15.
56) 예를 들면, P. J. Roscam Abbing 교수는 ‘인본주의적 생활 태도’에 대치된 개념으로서의 ‘인간의 영적 생활’을 영성으로 본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생활이며, 오늘날에도 ‘성령의 새로운 음성들’(nieuwe uitingen van de Geest)을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서보다 자신의 기도나 명상 등을 통해 성령의 음성이라고 느낀 것에서 찾는 주관주의의 길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C. Aalders는 ‘초월적 의미 부여에 응답하는 것’에서 영성을 찾고 있다. 즉 이 세상 밖의 실재를 지향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그리고 J. Firet는 ‘종교적 성격의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지향’을 영성으로 본다. 이러한 각도에서 그는 기도, 명상, 금욕 등을 다룬다. 한편 Frans Maas는 철학적으로 ‘전체에서 부분이 되는 것’을 영성으로 본다. 곧 영성이란 ‘전체를 표현하고 또한 체험하는 것’(uitdrukking en tegelijk beleving van de totaliteit)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G. van Leeuwen은 ‘성육화된 영성’을 주장한다. 곧 ‘서로에 대한 서로의 소명과 책임을 체험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영성을 수평화한 것으로 ‘연대성’(solidariteit)과 ‘참여’(engagement)를 강조하는 신학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Huub Oosterhuis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영성으로 본다. Dorothee Solle도 ‘다른 사람과의 연대’를 영성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녀는 순종이 아니라 자기실현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한다. 이상에 대해서는 Velema, Gereformeerde spiritualiteit, 제 2장을 보라. 이들은 오늘날의 시대 조류에 맞춰 여러 가지로 영성을 정의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성에 대한 최고의 유일한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영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 인간 중심의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57) 이에 대해서는 Lindeboom, Geschiedenis van De Hervorming, 353-379를 보라.
58) 예를 들어, 현재 화란에서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개혁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인 C. Graafland는 그의 Gereformeerden op zoek naar God란 책에서 칼빈과 종교개혁의 칭의 교리와 도르트 총회의 예정 교리 등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Velema, Gereformeerde spiritualitieit, 173-181을 보라.
59) Cf. 유진 오스터헤이븐,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 최덕성 옮김, 서울 1998, 185.
60) C. Trimp (red.), De biddende kerk. Een bundel studies over het gebed aangeboden bij gelegenheid van het 125-jarig bestaan van de Theolgische Hogeschool te Kampen, Groningen 1979.
61) 영국의 청교도주의와 독일의 경건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위 ‘개혁교회의 경건주의’(Gereformeerd Pietisme)에서도 ‘내면성’과 ‘영혼의 깊은 갈등’, ‘주관주의적 체험’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Cf. T. Brienen, “Vroomheid volgens het Gereformeerd Pietisme in Nederland, met name bij vader en zoon a Brakel”, in: Spiritualiteit, onder redactie van W. van 't Spijker, W. Balke, K. Exalto, L. van Daniel, Kampen 1993, 199. 그래서 ‘경건’(vroomheid)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무슨 ‘내적 체험’을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위 Brienen의 아티클에서도 화란의 개혁교회 경건주의를 다루면서 대표적인 인물로 Voetius보다는 다소간 신비주의적, 체험주의적 경향이 있는 a Brakel 부자(물론 아들 Wilhelmus a Brakel은 훨씬 더 건전하며 윤리적, 공동체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를 다루고 있는 것도 그 한 특징적 예이다.
62)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기독교 학문에 대한 성경적 조망」(한석 오병세 총장 은퇴기념논문집), 논문집 편찬위원회 편, 부산 1996, 197-212를 참조하라.
63)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 「개혁 교회의 정로」(허순길 박사 은퇴기념 논문집),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천안 1999, 99-117을 참조하라.
64) 카이퍼와 바빙크와 스킬더의 영성에 대해서는 R. H. Bremmer, “De spiritualiteit van Bavinck, Kuyper en Schilder”, in: Spiritualiteit, 253-270을 보라.
65) 예를 들면 Utrecht 대학의 C. Graafland 교수가 그 대표자이다. 그의 주장에 대한 소개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존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재고찰”, 「하나님 앞에서」(개교 50주년 기념논문집), 고려신학대학원, 부산 1996, 291f.를 보라.
66) 화란 자유대학의 Jan Veenhof 교수(은퇴)는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말씀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 그 어느 하나를 제외하고서 다른 하나를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날의 변화된 시대에 전통적인 강조보다는 ‘존경, 신뢰, 사랑, 개방성, 수용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그가 속한 자유대학과 화란개혁교회(신오달측)의 일반적 경향을 따라 ‘동성연애’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Cf. God met ons. Over de aard van het Schriftgezag, 1980(이 보고서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인데, 결국 동성연애와 같은 윤리 문제에 있어서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Veenhof는 이 보고서의 한 작성위원이었다). 또한 J. Veenhof, “화란개혁교회의 신학․영성사”,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최덕성 편저), 서울 1999, 285f.를 보라.
67) Abraham Kuyper, Het Calvinisme, Kampen 1898, 182f.
변종길 교수 논문 출처 바로가기(^^클릭하시면 스크랩한 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2)관상기도에 대한 소개/관상과 성숙 01/글:지붕과 쉼 정목사
"관상기도를 통한 영적 성숙에 대한 연구"
글/지붕과 쉼
영적 성숙이라는 문제는 크리스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별히 이 문제는 성화의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서 구원을 받지만 여전히
이땅에서의 삶은 아직 구원을 다 이루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의 목표,
즉 성숙의 목표를 가지고서
온전해지려는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나 이러한 크리스찬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끊임없는 고통과 절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이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 "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보잘것 없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고,
그러하기에 이러한 은총의
의인됨의 능력은
세상의 모든 절망과
죄악에서 해방되고
싸워이기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큰 절망 앞에 서는데,
그것은 '죄'라는 문제입니다.
죄는 우리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불러들이는 것이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죄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죄란 인간이 신 앞에서, 신에대한 관념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절망하여
자신으로 있으려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대인들의
절망은 대부분 이것에 속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문제를
너무 쉽게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취부합니다.
그래서 각종 비리의 문제와
각종 사회적 악의 문제에
그리스도인들이 심심치 않게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사회적인
부정의 문제, 부패의 문제,
그리고 성적인 타락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주기위해 도전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현대교회는 너무 쉽게 생각했고,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문제로부터 오는
절망과 불행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지 못해온 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코
고통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간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선인들은 끊임없이
'영적 성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영적 성숙이 없이는
인간에게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성숙' 앞에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언제나
죄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유혹의 쾌락이
인간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그리고 마음의 문이 닫힘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향해서
끊임없는 초청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십자가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청에 대하여 인간이
응답을 하지 않는다면
초청에 의한 영적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성숙을 이루는
초청에 응답하는 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그것은 기도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우리에게
영적 성숙을 이루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데,
이 만남의 역사는
우리로 성숙을 이루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되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상하게 '참된 나'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기도가
어렵게 느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좋은 하루되시기를.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관상과 성숙 01(바로가기)
3)향심기도-참자아 거짓자아 /서문/ 바실 페닝턴
참자아, 거짓자아- 서문 / 바실 페닝턴

환영합니다!
내가 이 책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이 문제가 여정중에 있는 우리 인간 개인들에게
얼마나 주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의 참 자아는 누구인가? 나는 나의 참 자아와 진실로
동일시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나의 거짓 자아를
나의 참 자아와 동일시 하는가? 그런 거짓 동일화가
내 인생에서 내가 경험했던 모든 불만들에 뿌리를
두는가? 어떻게 나의 거짓 자아를 드러낼 수 있는가?
-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이 거짓
자아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버려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그 자아인가? 어떻게 내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고 내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놀라운
기쁨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은 내 삶의 기본적인 질문들이었습니다. 나는
적어도 모든 사려깊은 사람들의 인생의 이런 저런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훌륭한 스승들의 도우심 덕분으로 나는 어떤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그런 답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답들이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음도 압니다. 이
답을 현실화 하도록 이끌어 주는 여러 길들이 있음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압니다 - 내가
노력해오고 그렇게 살아왔던 그 답은 현실적으로
내가 꿈꿔왔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기쁨과 행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들은 내가 여정을
계속함에 있어 내 삶에서 더 완전한 기쁨과
충만함을 끊임없이 약속해 줍니다.
여러분에 대한 나의 사람은 이 책을 쓰고 그 의미를
여러분과 나누려는 공기보다 더 큽니다. 그러나
나는 약속에 대한 응답으로 마침내 책상에 앉아
이 책을 쓴다고 고백합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내가 향심기도 과정을 지도할 때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나는 향심기도의 성과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상당히 주저하면서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향심기도를 하면서 그 성과를
바라는 시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정한
향심기도가 아니기 떄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집중해야
들어갑니다. 향심기도의 본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것을 찾지 않고 가능한 한 충분하고 순수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말합니다:
주님, 저는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선하셔서
당신께서 우리가 하고 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선에 대한 것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선에 의해서입니다.
서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중의 한명으로 여겨지는
히포의 아우그스티노는 매우 아릅답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전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사도 바울이 요약해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을 찾지 않으면서
향심기도를 해 나간다면, 향심기도는 우리 삶에서 매우
실제적인 성과,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성과를 줍니다.
내가 향심기도 과정에서 이 열매들에 대해 말했을 때,
보통 내가 첫번째로 말하는 것은 의식의 전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풍부한 정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 의식의 발전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치유에 대해 말함으로써 매우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로 돌아오게 합니다.
바실페닝턴 / 참자아 거짓자아(바로가기)
#05. 아름다운 시와 글
샤마임에 올라온 게시물 중에 나누고 싶은 글과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사랑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 위엔 잠시 정적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싸안을 땐, 전신(全身 )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흐트러 놓을 지라도.
왜?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만큼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심지어 그대들 속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햇빛에 떨고 있는 그대들의 가장 부드러운 가지들을 껴안지만,
한편 사랑은 또 그대들 속의 뿌리로 내려가 대지에 엉켜있는 그것들을 흔들어 대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마치 곡식단이듯 그대들을 자기에게로 거두어 들이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두드려 벌거벗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체로 쳐 쓸데없는 모든 껍질들을 털어버리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갈아 순백(純白)으로 반죽하여,
그런 뒤 신의 거룩한 향연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도록 성스러운 자기의 불꽃 위에 올려 놓는 것.
사랑은 이 모든 일들을 그대들에게 행하여 그대들로 하여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으로 삶의 가슴의 한 파편(破片)이 되게 하리라.
그러나 그대들 오직 두려움 속에서 사랑과 평화, 사랑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그땐 그대들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마당을 나가는 게 좋으리라.
계절도 없는 세계로, 그대들 웃는다 해도 실컷 웃을 수는 없는,
그대들 운다 해도 실컷 울 수는 없는 곳으로,
사랑은 저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저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
사랑할 때 그대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리라, 신은 나의 마음 속에 계시다」라고.
그보다 「나는 신의 마음 속에 있다」라고 말해야 하리라.
또한 결코 그대들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대들 가치 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랑이 그대들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사랑은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 다른 욕망은 없는 것.
그러나 그대들 사랑하면서도 또다시 숱한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없다면,
다음의 것들이 그대들의 욕망이 되게 하라-
녹아서, 밤을 향하여 노래하며 달려가는 시냇물처럼 되기를.
지나친 다정함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스스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그대들 상처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날개 달린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사랑의 또 하루를 향하여 감사하게 되기를.
정오(正午)에는 쉬며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명상하기를,
황혼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그런 다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음 속 으로부터 기도하고
그대들의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게 되기를.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豫言者) 중에서-
칼릴 지브란의 글을 음악과 함께 듣기(바로가기)
2) 자작글 / 내려놓음 /평화의 사람
내려놓음
글/ 평화의 사람
하나님!
늘 내것이라 움켜쥐며
내 마음으로 부터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움켜잡고 있던것을 내려 놓으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질 것인데
낡은 것에 익숙해
그것이 최고인냥 살았습니다.
그것을 가장 대표하는 것이
욕심이었습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하소서.
하나님!
명예와 체면 때문에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놓으시고
그로 물과 피를 쏟게 하시며
참다운 순종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는데......
내 어리석음이 믿는 다 하면서도
당신의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의와 잘남과
경험들을 내려놓고
당신의 계획과 뜻이
내 삶속에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내려놓음 속에
참 진리가 있음을...
내려놓음 속에
참 자유와 평화가 있음을...
내려놓음 속에
참 축복이 있음을 ....
깨닫게 하시고
삶속에 실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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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평화의 사람님 글(바로가기)
3) 사랑-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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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사랑(음악과 함께 감상하기.원문방으로 클릭^^)
#06.클래식과 국악 이야기 & 성화 예술
샤마임에 함께 하고 있는 클래식과 국악 그리고 성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방입니다.
1) 구노/로미오와 줄리엣 1박 꿈속에 살고 싶어라 생일을 축하하는 가면 무도회장에서 쥴리엣이 사랑의 황홀함에 대한 꿈과 기대를 발랄하게 표현하며 이렇게 노래 합니다. 아! 꿈속에서 나는 살고 싶네 아! 나를 황홀하게 만든 이 꿈속에서 달콤한 불길을 내 영혼 안에 간직하고 마치 하나의 보석처럼!
도취된 젊음은 단지, 하루만 지속되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때가 오면 행복은 달아나고 돌아오지 않네
나는 살고싶어라 우울한 겨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송이 꽃잎을 따기 전에 그 장미 향기에 취하네 달콤한 불길이여, 머물러다오 나의 영혼 안에 보석처럼 오래 오래!
Gounod / 'Je Veux Vivre Dans Ce Reve' from Opera "Romeo Et Juliette"
Anna Netrebko sop. Emmanuel Villaume cond. Orchestre National de Belgique
구노/로미오와 줄리엣 1막 꿈속에서 살고 싶어라
2)Romance
Romance의 음악적 용어로서의 의미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서정적인 小曲" 정도이다. 수없이 많은 로망스가 존재하지만 클래식 명곡 가운데 'Romance'로 명명하여 연주되는 가장 유명한 곡은 아무래도 베토벤의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2번 F장조'일 것이다. 소품으로 이름지어지듯 곡이 장황한 것이 거의 없으며 단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애조를 띤 유명 로망스 곡들을 엮어서 한 데 모아보았다.
Romance 음악감상하기(바로가기)
3)다시보는 명영상 빈 필을 거쳐간 역대 지휘자들
- 요한 슈트라우스 박쥐 서곡 카를로스 클라이버
-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Romance 음악감상하기(바로가기)
#07. 샤마임 토론의 방
"난상토론"에 올라온 글을 소개하고 나누는 곳입니다.
1) 재미있는 만평

[충청투데이]

[한겨례]

[강원일보]

[경인일보]

[경향신문]

[광주드림]

[광주일보]

[국제신문]

[기호일보]

[노컷뉴스]

[새전북만평]

[서울신문]

[충청투데이]

[한국만평]
======================조선만평=========================

언론탄압



협박

[20일]

2)관상에 대한 오해의 댓글에 대한 답변 모음
재미있는 관상에 대한 오해들(원문 클릭)
#08. 주일학교와 율동
"율동, 몸찬양, 기타 주일학교 찬양을 소개하고 주일학교에 대한 중요한 이슈들을 소개합니다."
1)2008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찬양,율동
[율동모음입니다. 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수정교회 버전입니다]
01. 나는 챔피언 / 썩지 않을 면류관 절제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2. 나는 챔피온 / Royal Crown (로얄 크라운)[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3. 겸손의 왕 예수님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4. 우리가 뛰어야 할 운동장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5. 예수님 기다려요 / 낮이나 밤이나 부활하신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6. 내 생각이 내 행동이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7. We are the champion / 나는 나는 달리네 / 우리는 챔피언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8. 나를 위하여 예비된 면류관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09. 승리 얻으라 너 주의 자녀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0. 나를 통하여 주님 영광을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1. 오직 하나님 영광위해 / 내가 꿈을 꾸는 모든 것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2. 우리는 챔피언 / 걸을수도 있어 달릴수도 있어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3. 면류관 면류관 면류관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4. 나는 달려가리라 / 나의 달려갈 길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5. 내가 받을 면류관 / 예수님을 닮으면 석지 않을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6. 신난다 신난다 신나다 [율동, 2008년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17. 토닥 토닥 안마송 / 사랑하는 친구야 시원하게 [율동, 2008 어린이전도협회 여름성경학교]
2)예장통합)여름성경학교 찬양,율동
[율동+악보 모음입니다. 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01. Jump To Jesus / Jump Jump Jump 널 부르셨어 [율동+악보] 02. 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율동+악보] 03. 내 속엔 다 있죠 [율동+악보] 04. 예수님 만나러 갑니다 / 내 마음에 예수님 크신 사랑 [율동+악보] 05. 달려가겠어요 / 어디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율동+악보] 06. 감사해요 /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율동+악보] 07.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는 [율동+악보] 08. 주의 어린이 / 세상이 강하여도 주님 함께 하시면 [율동+악보] 09. 믿음위에 반석위에 / 우리 엄마 아빠의 하나님 [율동+악보] 10. 예수님께서 똑똑똑 두드리고 [율동+악보] 11.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 날 돌아보사 [율동+악보] 12. 예수님 사랑 마음에 담아 [율동+악보] 13. 하나님 사랑 전해요 / 햇볕과 물 먹으며 나무가 [율동+악보] 14. Tell Me, God / 모세야 부르신 하나님 [율동+악보] 15.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 [율동+악보]
[찬양+악보 모음입니다. 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01. Jesus 원정대 / Let's go 야호 [찬양+악보] 02. Jump To Jesus / Jump Jump Jump 널 부르셨어 [찬양+악보] 03. 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찬양+악보] 04. 내 속엔 다 있죠 [찬양+악보] 05. 예수님의 눈길이 나의 마음 향할 때 [찬양+악보] 06. 하나님 나라 일꾼 / 키가 자라듯 우리 믿음도 [찬양+악보] 07. 예수님 만나러 갑니다 / 내 마음에 예수님 크신 사랑 [찬양+악보] 08. 달려가겠어요 / 어디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찬양+악보] 09. 감사해요 /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찬양+악보] 10.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는 [찬양+악보] 11.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행복한 어린이 [찬양+악보] 12. 주의 어린이 / 세상이 강하여도 주님 함께 하시면 [찬양+악보] 13. 믿음위에 반석위에 / 우리 엄마 아빠의 하나님 [찬양+악보] 14. 예수님께서 똑똑똑 두드리고 [찬양+악보] 15.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 날 돌아보사 [찬양+악보] 16. 예수님 사랑 마음에 담아 [찬양+악보] 17. 주의 말씀은 /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찬양+악보] 18. 하나님 사랑 전해요 / 햇볕과 물 먹으며 나무가 [찬양+악보] 19. Tell Me, God / 모세야 부르신 하나님 [찬양+악보] 20. 주님의 품으로 Jump / 움추린 어깨를 활짝 펴 [찬양+악보] 21. 일어나라 주의 어린이 [찬양+악보] 22. 감사 찬양하세 / 넓은 들녁엔 황금물결 [찬양+악보] 23.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 [찬양+악보] 24. 여름성경학교 교가 / 흰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찬양+악보]
[파워포인트 PPT 악보.]
2008성경학교차례 / 하나님 나라 일꾼/ 주님따라 빛따라/ 하나님나라 만들어가지/예수님 만나러 갑니다/ 일어나라 주의 어린이 내속엔다있죠/ 세상으로 / 꿈꾸는사람. / TellMeGod / 예수믿는내마음은 예수님사랑마음에담아. / 주님의꿈으로Jump. / 다음세대부흥의주인공. / 하나님의사랑은 / 달려가겠어요 주의영광임할때까지. / 하나님의사람모세. / 하나님의능력. 모세의노래 / JumpToJesus. / Jesus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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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esus 원정대 / Let's go 야호 [MP3] 2. Jump To Jesus / Jump Jump Jump 널 부르셨어 [MP3] 3. 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MP3] 4. 내 속엔 다 있죠 [MP3] 5. 예수님의 눈길이 나의 마음 향할 때 [MP3] 6. 하나님 나라 일꾼 / 키가 자라듯 우리 믿음도 [MP3] 7. 예수님 만나러 갑니다 / 내 마음에 예수님 크신 사랑 [MP3] 8. 달려가겠어요 / 어디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MP3] 9. 감사해요 /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MP3] 10.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는 [MP3] 11.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행복한 어린이 [MP3] 12. 주의 어린이 / 세상이 강하여도 주님 함께 하시면 [MP3] 13. 믿음위에 반석위에 / 우리 엄마 아빠의 하나님 [MP3] 14. 예수님께서 똑똑똑 두드리고 [MP3] 15.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 날 돌아보사 [MP3] 16. 예수님 사랑 마음에 담아 [MP3] 17. 주의 말씀은 /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MP3] 18. 하나님 사랑 전해요 / 햇볕과 물 먹으며 나무가 [MP3] 19. Tell Me, God / 모세야 부르신 하나님 [MP3] 20. 주님의 품으로 Jump / 움추린 어깨를 활짝 펴 [MP3] 21. 일어나라 주의 어린이 [MP3] 22. 감사 찬양하세 / 넓은 들녁엔 황금물결 [MP3] 23.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 [MP3] 24. 여름성경학교 교가 / 흰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MP3]
[악보+가사 모음입니다. 클릭하면 바로 이동합니다] 01. Jesus 원정대 / Let's go 야호 [악보+가사] 02. Jump To Jesus / Jump Jump Jump 널 부르셨어 [악보+가사] 03. 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악보+가사] 04. 내 속엔 다 있죠 [악보+가사] 05. 예수님의 눈길이 나의 마음 향할 때 [악보+가사] 06. 하나님 나라 일꾼 / 키가 자라듯 우리 믿음도 [악보+가사] 07. 예수님 만나러 갑니다 / 내 마음에 예수님 크신 사랑 [악보+가사] 08. 달려가겠어요 / 어디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악보+가사] 09. 감사해요 / 나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악보+가사] 10.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는 [악보+가사] 11. 우리는 주님의 사랑안에서 행복한 어린이 [악보+가사] 12. 주의 어린이 / 세상이 강하여도 주님 함께 하시면 [악보+가사] 13. 믿음위에 반석위에 / 우리 엄마 아빠의 하나님 [악보+가사] 14. 예수님께서 똑똑똑 두드리고 [악보+가사] 15.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 날 돌아보사 [악보+가사] 16. 예수님 사랑 마음에 담아 [악보+가사] 17. 주의 말씀은 /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악보+가사] 18. 하나님 사랑 전해요 / 햇볕과 물 먹으며 나무가 [악보+가사] 19. Tell Me, God / 모세야 부르신 하나님 [악보+가사] 20. 주님의 품으로 Jump / 움추린 어깨를 활짝 펴 [악보+가사] 21. 일어나라 주의 어린이 [악보+가사] 22. 감사 찬양하세 / 넓은 들녁엔 황금물결 [악보+가사] 23.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 [악보+가사] 24. 여름성경학교 교가 / 흰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악보+가사]
3)예장합신)여름성경학교 찬양, 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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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나님의 사람 /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악보+가사] 02. 고난이 찾아와도 원망하지 않아요 [악보+가사] 03. 최고의 선물 /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악보+가사] 04. 우스 땅의 욥 / 우스 땅에 욥이라는 [악보+가사] 05. 내 손을 꼭 잡고 / 믿음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악보+가사] 06. 하나님 아는만큼 힘이 되어요 [악보+가사] 07. 감사해요 찬송해요 내 생명 [악보+가사] 08. 욥23:10 / 내 길을 그가 아시나니 / 내 가는 길 아시는 주 [악보+가사] 09. 일월화수목금토 [악보+가사] 10. 이제는 뵙니다 / 아침 길목에 영롱한 구슬 [악보+가사]
4)감리교단)여름성경학교 찬양, 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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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Happy Together (해피 투게더) / 랄라라랄라라 랄라라랄라라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2. 나는야 사랑의 메신저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3. 뱅뱅 / 다윗이 물맷돌을 힘껏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4. 바로 지금 지금 이 시간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5. 나는 예배합니다 /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면서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6. 전해요 예수님의 사랑을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7. 꼭꼭 닫은 나의 맘을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8. 예수님처럼 / 나는 나는 예수님만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09. 하나님 들리시죠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0. 내 맘이 말해요 이렇게 이렇게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1. 나는 삭개오 / 나는 나는 삭개오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2. 나는 소중한 사람 예수님 향기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3. 사랑해 축복해 /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4. 예수님의 어린이 / 예수님의 어린이는 예뻐요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5. 나는 나는 예수쟁이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6. 나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 내 안에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17. 아름다운 주님 나라 / 언제나 어디서나 내 꿈은 [2008년 감리교단 여름성경학교]
5)성결교단)여름성경학교 찬양, 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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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단 총회버전입니다.]
00. 20곡 전곡 파워포인트 PPT 악보 다운받기(성결교단 총회 버전)
01. 하나님의 사랑 나눠요 / 하나님의 크신 사랑 받는 우리[파워포인트 PPT 악보] 02. 넘쳐요 퐁퐁퐁 / 채워요 채워요 내 맘에[파워포인트 PPT 악보] 03. 이젠 나눌래요 / 기쁠때나 슬플때나 나를 사랑하시는[파워포인트 PPT 악보] 04. 말씀하세요 / 하나님 말씀하세요 사랑한다[파워포인트 PPT 악보] 05. 몽글몽글 주님사랑 / 나를 보고 두 팔 벌려 안아주시는[파워포인트 PPT 악보] 06. 부릉부릉 슈웅슈웅 / 부릉부릉 뛰뛰빵빵[파워포인트 PPT 악보] 07. 사랑가 / 사랑사랑 사랑사랑 내 사랑이야[파워포인트 PPT 악보] 08. 끊을 수 없어 /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파워포인트 PPT 악보] 09. 사랑이예요 / 싱글싱글 싱글싱글 웃는 친구들이[파워포인트 PPT 악보] 10. 점점 커지는 사랑 / 내꺼야 내꺼 내 마음 속에[파워포인트 PPT 악보] 11. 나눠주면 / 터질것 같은 내 마음속 사랑[파워포인트 PPT 악보] 12. 한번 해볼까요 / 한번 해볼까요 사랑을[파워포인트 PPT 악보] 13. 사랑먹고 자라요 /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파워포인트 PPT 악보] 14. 끝없는 사랑 / 날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파워포인트 PPT 악보] 15. 혼자가 아니야 / 두리번 두리번 찾아봐도[파워포인트 PPT 악보] 1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예수님 진실한 사랑을[파워포인트 PPT 악보] 17. 예수 안에서 / 예수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합니다[파워포인트 PPT 악보] 18. 예수님의 사랑 실천해요[파워포인트 PPT 악보] 19. 꿈벅꿈벅 / 꿈벅꿈벅 꿈벅 하마 아저씨[파워포인트 PPT 악보] 20. 내맘에 / 내 맘에 예수님 오셔서[파워포인트 PPT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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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나님의 사랑 나눠요 / 하나님의 크신 사랑 받는 우리 [악보+가사] 02. 넘쳐요 퐁퐁퐁 / 채워요 채워요 내 맘에 [악보+가사] 03. 이젠 나눌래요 / 기쁠때나 슬플때나 나를 사랑하시는 [악보+가사] 04. 말씀하세요 / 하나님 말씀하세요 사랑한다 [악보+가사] 05. 몽글몽글 주님사랑 / 나를 보고 두 팔 벌려 안아주시는 [악보+가사] 06. 부릉부릉 슈웅슈웅 / 부릉부릉 뛰뛰빵빵 [악보+가사] 07. 사랑가 / 사랑사랑 사랑사랑 내 사랑이야 [악보+가사] 08. 끊을 수 없어 /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악보+가사] 09. 사랑이예요 / 싱글싱글 싱글싱글 웃는 친구들이 [악보+가사] 10. 점점 커지는 사랑 / 내꺼야 내꺼 내 마음 속에 [악보+가사] 11. 나눠주면 / 터질것 같은 내 마음속 사랑 [악보+가사] 12. 한번 해볼까요 / 한번 해볼까요 사랑을 [악보+가사] 13. 사랑먹고 자라요 /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 [악보+가사] 14. 끝없는 사랑 / 날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악보+가사] 15. 혼자가 아니야 / 두리번 두리번 찾아봐도 [악보+가사] 1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예수님 진실한 사랑을 [악보+가사] 17. 예수 안에서 / 예수 안에서 서로서로 사랑합니다 [악보+가사] 18. 예수님의 사랑 실천해요 [악보+가사] 19. 꿈벅꿈벅 / 꿈벅꿈벅 꿈벅 하마 아저씨 [악보+가사] 20. 내맘에 / 내 맘에 예수님 오셔서 [악보+가사]
6)기장총회)여름성경학교 찬양, 율동
#09. 이달의 책 이야기
읽을 만한 책을 한 권씩 소개합니다
1)엔도 슈사크의 "침묵"

엔도 슈사크의 "침묵"(바로가기)
#10. 샤마임 칼럼
이곳은 누구나 "~테마&샤마임소식지"에 글을 올리시면
이곳에 글을 실을 수 있는 장으로 마련된 곳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이 칼럼 방은 이 달 내에 작업해서 올리겠습니다. 샬롬^^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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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임수도원공동체는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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