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간단한 살핌을 통해서 본-
본회퍼의 신학사상-그의 7작품을 중심하여- : 제 1 장 본회퍼 연구를 위하여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와 그의 쌍둥이 누이 사빈(Sabine)은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교회사가 칼 폰 하제(Karl von Hause)였고,
본회퍼의 아버지 루드비히 본회퍼(Karl Ludwig Bonhoeffer)는 외과의사였다.
1912년 본회퍼의 가정은 베를린(Berlin)으로 이사왔고 부친은 베를린 대학의
정신분석학 교수가 되었다. 16세에 본회퍼는 목회자가 되려고 결심했는데,
부모로부터 아무 지지도 못얻었고 그의 형들에게서 반대를 받았다.
1923년 가을에 그는 튀빙겐(Tübingen)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년후(1924년) 그는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이곳에서
여러 석학들을 만났다. 본회퍼는 홀의 지도하에
「루터의 편지들(1540~1546)에 나타난 바, 그의 생애 말년에 있어서
루터의 자기 작품에 대한인상들」 및 「1535~1545에 있었던 신학논쟁에
의한 루터의 성령론」을 썼다. 그리고 조직신학 교수요, 본회퍼의
재학중 2권의 『기독교 교리사』를 출판한 바 있는 제베르크 밑에서
신학석사(the licentiate of theology)를 취득했다. 1972년 본회퍼는
제베르크의 지도하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그 제목은
『성도들의 교제 :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적 탐구』(Sanctorum
Communio : A Dogmatic Investigation of the Sociology
of the Church) 였다. 1928년 본회퍼는 신학훈련을 끝내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 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했다. 1912년 베를린 대학으로 다시 돌아와 교수가
되기 위한 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했는데, 이것이
1930년에 끝마친 『행동과 존재:조직신학에 있어서 초월주의적
철학과 존재론』(Act and Being : Transcendental Philosophy
and Ontology in Systematic Theology) 이었다. 본회퍼는
교수자격을 얻은 직후 교수직을 수행하기에 앞서 1930년
늦여름에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갔다. 이때에
본회퍼는 미국 신학생들이 깊은 신학보다는 경건, 사회적 관심
및 실천적 윤리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1932년
바야흐로 히틀러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는 교회의 영역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이때에 히틀러와 “독일 기독교인들”에
대한 항거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본회퍼는 이들
복음주의자들의 히틀러 항거운동에 가담하였다. 1933년
여름에 휴가를 얻어 런던에 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본회퍼는 영국에서 목회적
의무를 다하면서 독일교회의 반 히틀러 투쟁에 계속 참여함으로
바야흐로 본회퍼는 독일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이 되었다. 1935년 4월 그동안 세워진
"고백교회의 긴급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부름을 받아 귀국한
다음 발틱해 근처에 있는 징스트(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들을 돌봐야 했다. 그러던 중
핀켄발더(Finkenwalde, Pomerania)에 새로 건립된 비합법적
고백교회계통 신학교를 책임맡게 되었다. 본회퍼는
이 피켄발더 기간에 17세의 마리아(Maria)라는 여자와
약혼하였다. 1936년 2월 29일에서 1936년 3월 11일까지
스웨덴에서 열리는 에큐메니칼회의에 참석하여 덴마크와
스웨덴을 견학하였는 바, 코펜하겐, 룬트, 스톡홀롬, 웁살라
등을 방문하여 주립대학, 교회를 견학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본회퍼는 독일교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던 중
1936년 8월에는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는데 본회퍼는
이 기회에 독일 고백교회의 반히틀러운동에 대하여 널리 알렸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정복한 지 1년 후인 1939년에는
체코를 침공했다. 이때에 본회퍼의 영국친구들은 본회퍼가
본국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니버와 레만(Paul Lehmann)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하였다. 이때 그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물고
다시 귀국하여 고백교회를 위하여 일할 것을 약속하고
그들의 초빙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본회퍼는 독일에 남겨두고 온 형제들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본회퍼는 뉴욕시에 있는
독일인 피난민들 교회에서 목회하도록 초대되었는데
그는 독일로 자유롭게 귀국할 것을 결심하였다.
본회퍼는 1939년 6월 25일에 독일에 도착하였다.
1940년 여름 이후 본회퍼는 독일 군부내 군정보부에서
정보부장부관으로 일하는 그의 매부 도나니(Hans von Dohnanyi)의
알선으로 군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 요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히틀러를 적(敵) 그리스도로 간주하였다. 이때에 본회퍼는
비밀경찰의 눈을 피하여 스위스에 가서 바르트와 W.C.C 총무인
후프트(Visser's Hooft)를 만났으니, 그는 이때 군정보부 요원이었다.
1942년 가을에 본회퍼가 약혼했는데, 바로 이때 이미 같은 정보부
상관 가운데 한 사람은 체포되었다. 그래서 본회퍼와 그의 친구들은
체포될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1943년 4월 5일 본회퍼는 비밀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18개월 동안이나 베를린에 있는
테겔(Tegel)형무소에 보냈다. 베트게에 의하면 1944년 9월에 있었던
히틀러의 처형에 대한 지령에는 본회퍼가 제외되어 있었으나 점차
치밀한 조사 끝에 1945년 4월 5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특별 지령에
따라 본회퍼는 처형될 인사들의 명단에 실렸다. 1945년 2월
부헨발트(Buchenwald)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1945년 4월 3일, 부활절 다음 화요일에 이들 국제 옥중 인사들은
플뢰센부르그(Flössenburg)에 있는 비밀경찰 강제수용소에 있는
비밀경찰 강제수용소로 또 옮겨졌다. 1945년 4월 9일 동틀 무렵
본회퍼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는 20세기의
순교자의 죽음을 죽은 것이다.
그 푸른 오월에 - 모래시계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