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개치 않는 교만
샬롬^^ 오늘도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요즘 제 마음에 간절함은 '말씀'을 '말씀'에 의해서 풀어주는 설교가 그립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으로 풀이를 합니다만, 간혹 '자신의 주장'을 말씀으로 풀어서 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합니다. 하다못해 논문을 쓸 때도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학문의 기초임을 인식하며 쓰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본문 말씀'에 근거한 메시지가 선포되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케리그마'지, '나의 주장'이 케리그마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의 침체는 '나의 주장'이 '복음'으로 둔갑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말씀에서 이야기하시는 메시지를 현대의 옷에 맞추어서 선포하고, 그리고 적용하는 케리그마의 역사는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줄 믿습니다. 참된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회복과 부흥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참된 말씀 앞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영혼들도 있고, 반항하는 영혼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복음의 진리 앞에서 시험에 들지 않는자가 복된 줄 믿습니다.^^
오늘 묵상은 마태복음 11장 20-24절 말씀입니다.^^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주 활동 무대였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자주 볼 수 있던 곳들이 바로 고라신, 벳세다와 가버나움입니다. 갈리리 바닷가를 중심으로 세 지역은 한 문화권에 들어 있었습니다. 거리고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그리고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습관을 따라서 자신들의 사상을 결코 비워내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통해서 믿음을 얻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양심의 찔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이라 탄식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은 우상숭배가 가장 창궐했던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시돈 출신의 이세벨은 그 지역의 우상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결국 '두로와 시돈'은 '바알과 아세라'라는 세상의 우상중심의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역에도 다녀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한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곳에서 권능을 행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했다면 그들은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갈릴리 지방의 예수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보았던 가버나움 지역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영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모습을 그대로 생각나게 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만으로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교만(휴브리스)은 그 중심에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내가 의롭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이 '나'입니다. 지금 가버나움 문화권에 있는 이들의 의식은 '선택받은 존재가 나이다'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의인이다'라는 등식이 성립이 됩니다. '의인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두 회개하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민족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역사를 대비하면서 회개의 자리를 먼저 허락받는 민족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의 교만은 결국 먼저 회개의 자리를 허락받은 혜택을 박탈당하는 치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은 회개를 놓치게 하였고, 이방민족들이 먼저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역으로 뒤바뀌는 비참함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혜택받은 우리의 모습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 안에 교만이 가득하다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아니 회개거리가 없겠지요. 말씀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복 중에 복일줄 믿습니다.^^
어느 날 지심
ⓞ지심 정경호 words more... 샤마임 출판신청 일백교회,일백선교200원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