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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상과 성숙 22-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영성에 대한 생각들

by 지심 정경호 2007. 5. 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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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향기마을

Lectio Divina / 관상과 성숙 22

 관상 기도의 내용에 따른 영적 성숙


여기에서 관상의 실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거룩한 독서와 향심 기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양 수레바퀴와 같은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관상은 있을 수 없고 관상이 없는 말씀의 깨달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거룩한 독서와 향심 기도를 관상으로

이르는 기도의 방법과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통한 영적 성숙


  # 거룩한 독서의 정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는 말은 명사 lectio(독서)와 divina(신적)이라는

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divina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서를 뜻하는데,

그래서 이것을 ‘거룩한 독서’ 또는 ‘성독(聖讀)’으로 번역하여서 사용하고 있다.

거룩한 독서는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도는

수도원의 환경에서 발전되어진 관상기도의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말씀은

히브리어로 dabar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물의 밑바닥을 의미하고 있다.

즉 사물 속에 숨어 있는 핵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을 말씀한다함은 바로

사물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또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을 활성화시킴을

의미한다.1) 다시 말해서 사물 속에 숨어 있는 그것이야말로 사물의 가장

역동적이고 깊이 존재하는 실재이며 소명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물을 창조하시되 무(無)로부터 흘러나오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효력 없이 되돌아가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은 헬라 적인 사고 개념과는 다르게, 말씀은 늘

효력을 발휘하며 강한 힘을 지닌 것으로 행동과 말씀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써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씨앗, 즉 생명을 품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씨앗이 지닌 생명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큰 나무가 되도록 성장시키는 그 무엇이다. 말씀은

개인의 삶 안에서 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도 싹이 트고, 세상을 새로운 현존으로

채우면서 자라난다. 말씀은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며 이들을

양육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이 말씀은 모든 것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뜻이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러한 말씀은

이냐시오가 말하듯 침묵 속에 숨어 계시던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는데,

이 사건은 성육신의 사건이며, 그리고 이 사건은 한 위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은 성서 안에서 인간의 말씀이 되셨으며,

이것은 구원의 역사의 차원에서 발견되는 성육신의 사건과 동일한 것이다.

즉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은 결국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내가 성서에서 찾는 그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룩한 독서는

바로 성례전의 의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즉 영생의 말씀을 먹는

것으로 이것은 영생의 생명을 섭취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거룩한 독서의

종착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호내재(circumincessio)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말씀이

우리 마음에 통과하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서

거룩한 독서는 이론적이고 피상적인 만남이 아닌 하나님과의 접촉을 위한

독서(lecture-contact), 만남을 위한 독서(lecture-lencontre)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접하는 말씀은 “나를 위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편지의 수신인은 ‘나’로서, 말씀은 나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이며,

둘째, 이 편지는 나에게 써 보내신 편지로서 편지의 소재는 바로 ‘나의 역사’이고,

셋째, 나에게 써보낸 이 편지는 내 자신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독서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자발적(spontaneous)기도로써 깊이 있는 수준의 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힘을 기르는 ‘정감적 기도’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정감적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사색과 기도가 단순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관상(contemplation)으로 가게 되는 ‘관상기도’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독서란

“기도와 함께 하는 독서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묵상이 낳은 기도”로써

묵상에 대한 응답인 기도를 통해서 관상에 이르는 기도이다.


  # 거룩한 독서에 대한 역사적 이해

오늘날 말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본질적인 힘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힘을 잃게 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2)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말씀을 평신도들에게 돌려줌으로써 말씀의 관심이 교회 내에서

확산되었고 이성적인 접근을 많이 하게 되었으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현현(顯現)하심의 체험적인 기도로 발전하지 못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가톨릭은 더욱 심해서 말씀을 평신도들에게 주지 못하고 그럼으로

참된 말씀이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거룩한 독서가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하였다.

 

거룩한 독서의 시작은 유대의 랍비들의 전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랍비들은

토라를 창조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믿었고, 이것을 독서와 묵상과

기도로써 자기의 것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거룩한 독서의 기본적인

요소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독서, 묵상 그리고 기도이다. 이러한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묵상의 방법을 기독교는 유산으로 물려받았고

이 전통은 동서방의 교부들에게는 공통적인 방법이었다. 이런 흐름이

16세기를 지나가면서 개신교를 통해서 말씀의 중요성이 이어져 갔고,

가톨릭은 수도승들을 통해서 명맥이 이어져 갔는데, 이러한 이어져 가는

과정 속에서 거룩한 독서의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들과 갈등을 겪는

시기도 있게 되었다.

 

이 흐름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 때에 평신도와

수도자들에게는 거룩한 독서가 Lectio Divina로 불려졌고,

그리고 권장이 되었다. 12세기에는 거룩한 독서가 큰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은 거룩한 독서가 가톨릭의  성무일도로 대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흐름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었다.

또한 12세기 때에 종교적 사조의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인해서 말씀에

대한 분석의 능력이 매우 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거룩한 독서에

기초를 둔 자발적인 관상으로 이끌어 가는 관상기도의 보편적인 명맥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중세 말기에 수도원을 통해서 이어져온 거룩한 독서를 고수하던 수도승들은

사제 수도자(canonici regolari)들과 도미니코 회원들을 비판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추구했던 스콜라식 성서 독서가 독서와 기도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질문과 논증을 지향3)함으로 거룩한 독서의 전통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냐시오식 묵상방법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그 이유는 처음 이냐시오는 기도와

관상을 추구하였는데, 그의 후계자들은 관상으로 가는 흐름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4)

 

거룩한 독서를 체계적으로 정립했던 인물이 귀고 2세이다. 12세기의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를 네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귀고 2세의 방법을 중심으로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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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룩한 독서는 구약성서의 이삭이 우물을 파는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삭의 우물 파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에 매우 고통스러움이 수반되지만,

이 고통 뒤에 오는 물은 우리에게 ‘노래와 춤’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깊은 곳에 들어 있는 물을 파는 행위가 바로 거룩한 독서이며,

이 과정 후에 오는 물은 매우 역동적인 기쁨을 주는 것이다.

2)거룩한 독서가 곤경에 처하게 된 주요 원인은 지나치게 두뇌위주적이고

지적인 측면만 강조하게 된 것에 있다.

3) 16세기로 들어가면서 정신 기도가 성행했는데, 이것은 사고(思考)를

주로하는 논리적 묵상, 의지의 행위를 중점으로 하는 정감적 기도,

하나님에게의 몰입을 주로 하는 관상으로 분리시켜서 행해지게 되었다.

4) 이냐시오는 하나의 기도의 방법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성수련’을 묵상의 방법으로 격하시킨 것은 예수회원들 자신으로서,

대표적으로 1574년 예수회의 총장 신부인 에버라드 머큐리언은 정감적 기도와

오감의 응용으로 하는 기도를 금지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금지는 1578년에도

다시 거듭되면서 이냐시오의 묵상의 방법이 논리적 묵상에 머물게 하였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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