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부터 비가 옵니다. 봄비로 좋긴 하지만 좀 더 따뜻해졌으며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제는 완연한 봄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겨울내내 입었던 두터운 외투을 세탁소에 맡기려고 벗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는 그보다 더 얇은 잠바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얇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는 밤 늦게 존경하는 교수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아무튼 교수님 앞에서는 졸업을 했어도 학생인가 봅니다. 어떤 질문에 쩔쩔매는 제 모습을 보다가도, 매서운 질문도 해 보기도 하면서 신학도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이제는 저도 제법 '고집'을 피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과의 신학적 차이가 느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멀었지만, 약간씩 제 스스로의 이론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더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무엘상의 말씀 중에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본문을 일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에 요나단이 자신이 도와 줄 것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정의 맹세를 한 두 사람의 사이에 아버지의 '노함'이 끼어들었습니다. 이 '노함'은 요나단의 왕위를 이을 자리의 문제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지요. 요나단은 자신의 왕권과 다윗과의 우정 앞에서 당연히 '우정의 자리'를 선택합니다. 사울왕의 초하루 식사 자리에는 다윗도 참여해야만 하는 중요한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자리에 대해서 다윗이 불참하면서 요나단에게 매년제를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분노하면 다윗을 죽이려고 작정한 일이요, '좋다'라고 말하면 분이 풀린 증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에 둘은 다시 들로 나갑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모두 '좋다'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가끔은 '노함'의 모습 앞에서 사람이 결단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노함의 역사 앞에서 온전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입니다. 인생은 사람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독립해야 하지요.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면 당연히 독립을 해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불신앙은 때로 '노함'을 통해서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좋다'라는 말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를 바라지만, '이제 따로 시작해도 좋다'라는 말이 만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노함'을 배격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할 것입니다. '좋다'와 '노함'의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안에 있어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