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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상 기도를 통한 영적 성숙에 대한 연구 31 / 향심기도의 네 순간과 네 가지 동의

향심기도

by 지심 정경호 2006. 4. 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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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심 기도의 네 순간과 네 가지 동의

거짓 자아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거짓 자아를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를 신성한 치료자로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치료의 과정은 향심 기도 안에서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는데, 이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의 네 순간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도입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부드럽게 형성”하는 때이다. 이것을 기도의 시작의 순간으로 말한다.

이 기도의 시작은 두 번째의 순간을 맞이하게 하는데, 그것은 ‘휴식’의 순간으로, 이것은 “평화, 내적 침묵, 만족감, 편안한 감각, 행복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 등 광범위한 심리적 인상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때의 휴식이 매우 깊은 경우에는 지나가는 사고가 거의 없거나 혹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깊은 휴식은 하나님과의 심리적인 전이로 이끌어 가게 되는데, 이러한 전이는 하나님을 치료자로 받아들이며, 그리고 어렸을 적에 중요한 인물로부터 우리가 받아 보지 못했다고 느꼈던 신뢰와 사랑을 전이 속에서 치료자에게 기대하게 됨으로 상처의 치유가 일어나게 된다. 상처의 치유는 신학적 성찰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정서는 이성의 법칙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치유의 역사를 가져오는 깊은 휴식이 오는 이유는 “사고에 대해 집착하거나 혐오감을 갖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결과일 뿐 아니라 신성한 신비(즉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낀 데서 온 결과이다.” 이러한 휴식을 신적 내재(Divine Indwelling)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휴식이 자라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깊어지게 된다. 이러한 휴식은 육체의 긴장까지 풀리게 하는데, 육체는 어릴 적의 정서적 아픔과 그것을 방어기제나 보상적인 활동으로 다루려고 한 것들이 쌓여져 있는 창고로써, 이 휴식을 통해서 방어기제들이 부드러워지고 육체의 원래의 능력은 회복하게 되며 정신 안에 쌓여 있는 쓰레기들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통해서 오는 정신적인 현상을 ‘정신적인 메스꺼움’이라고 부르는데, 유아나 아동기 때에는 아픔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아픔과 상처들의 정서적인 경험들은 무의식에 넣어져서 에너지로 남아 있게 되었던 것들이었다. 무의식 속에 있는 정서의 에너지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표현함으로써만 소멸되는 것인데, 이러한 깊은 휴식은 바로 그러한 치유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다.

향심기도의 세 번째 순간이 있는데, 이것을 ‘무의식을 덜어 냄’이라고 부른다. 이 세 번째 순간은 휴식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져 우리의 의식 속으로 인식되는 과정으로써, 이것은 ‘덜어 냄’의 작업을 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덜어 냄’이란 정신적인 메스꺼움의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사고들이 올라오는 가운데 이 메스꺼운 의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어떤 원인으로부터 발생했는지를 모른다면 바로 그것이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순간이 있는데, 이러한 원시적인 정서적 내용들을 배설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서적 내용물들이 오래되면 될수록 배설하는 고통은 매우 극심하게 다가오게 되는데, 향심 기도자가 오랜 훈련을 통해서 매일 수련했을 경우에는 이러한 고통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인해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 순간은 계속적으로 되풀이되는데, 정확히 말하면 똑같은 위치에서의 되풀이가 아니라 영적인 깊이가 더 깊어지면서 되풀이되어 가게 된다. 이러한 운동이 계속되면서 정서적 아픔들이 계속해서 배출되게 되면, 그만큼의 내적 공간이 생겨나게 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향심 기도의 네 운동은 나선형의 계단과 같은 역동적인 과정으로 진행되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의 끝에는 하나님과의 일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가오는 영적 성숙의 여정은 거짓 자아를 연속적으로 모멸 당함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관상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어둔밤’들이 다가오는데, 이것은 정화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하나의 현상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향심 기도의 네 순간을 통한 원운동의 여정은 영적 성장의 여행을 하게 하는데, 이러한 여정은 우리의 인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며, 이것은 마치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발굴현장에서의 탐험과 같은 내면의 발굴을 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네 가지의 동의를 하게 되는데 이것에 대하여 존 둔(John S. Dunne)은 영적 여정이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는 삶의 과정과 상응 하다고 주장하면서, 네 가지의 동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로 아동기 때의 동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원래 아동기 때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들의 기능들을 체험하고, 상상과 기억들을 발전시키며, 가족과 또래 친구들의 관계를 맺음으로 우리의 존재가 원래 선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아동기의 환경이 공포와 거부로 싸여 있거나 신체적인 혹은 다른 장애들을 가져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동의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처들을 지닌 채 생존하려는 욕구 때문에 우리의 자아를 그대로 방치하며 다음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두 번째 동의는 청소년기로,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창조적 에너지를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발달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시게 되는데, 이 시기의 자아는 아동기의 의식에서 탈피해서, 이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능력이 자람으로 스스로를 책임지는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이들의 정서가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능력이 형성되기도 전에 성적 에너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성적 에너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태도의 왜곡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간관계를 더욱 어렵게 하고, 창조적인 잠재력과 성적인 것이 선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을 정서가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면, 두려움으로 인해 무의식 속에 이러한 것들을 억압하게 되고, 이것은 신체적인 질병이나 불건전한 행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세 번째 동의는 성년기 초기에 질병과 노령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의 존재가 보잘것없음(비존재)과 그러한 우리의 비존재 앞에서 자아가 언젠가는 소멸될 것(자아 소멸)에 대하여 동의할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우리의 비존재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죽음이 가져오는 사멸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으로 오는 결과,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모든 것(사람이나 장소나 사물 등)을 떠나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동의하는 것에 대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어렸을 적에 사랑하던 사람의 사망이나 극단적인 어떤 손실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면 동의를 하지 못하게 된다.

네 번째 동의는 변형(transform)에 대한 동의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러한 변형의 동의에 대하여 별 이의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 부분에 대하여 거룩한 사람들까지도 서두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변형의 동의 또한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이 변형의 동의는 바로 거짓 자아의 죽음에 우리가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짓 자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유일한 자아로 인식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의 동의는 하나님의 초대로써 우리의 삶의 현실과 죽음의 현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써 받아들이고 환영하라는 것이고, 동시에 이 우주 안에서 있는 전 인류의 한 구성원이 된 것을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영적 성숙의 여정이 이것에서 끝나버린다면 이것은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 우상숭배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우리의 동의는 동의 자체에 목적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며 일치를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각각의 동의는 죽음이 있고, 이 죽음은 바로 우리가 동의하는 것들의 한계를 뒤로 남기고서 더 앞으로 나가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동의할 수 없고, 이 동의는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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