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한 하나님
지공무사(至公無私) 한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과연 하나님은 선인과 함께
악인에게도 양광(陽光)과 우로(雨露)를 한결같이 주어 양육하시며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며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를 우둔한 자로써 부끄럽게 하시는 이시다. 일개인 생애로나 일민족
역사로 보나 전인류의 대경륜(大經綸)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지공무사하신 실증을 실로 매거(枚擧)
하기 번거롭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률(一律)로 추리 할 수 있는 일개 법칙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극력으로 공평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면서도 또한 일방으로 심술 궂은 일 하시기를
다반사로 아시는 듯하다. 무릇 공평이라는 관념과는 정반대의 행사를 불관(不關) 허용하실 뿐더러
자진 여행(勵行)하셔서 자칭 경건한 자라, 독신자라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좁은 염통이 터지게 하시며
그 작은 심장이 파열케 만들어 비로소 하나님이 무한대하게 위대하심을 나타내시며 인간의 용렬함을
참회케 하여 단일단(段一段)으로 영성(靈性)을 향상시키는 교육에 열중하시는 듯하다. 이는 하나님이
죽은 이법(理法)의 신이 아니요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이며, 목석과 같은 감각을 초탈한 존재가 아니요
증애(憎愛)의 정이 농후한 까닭이다.
보라, 우리 골육(骨肉)의 친자(親子)의 관계를, 무릇 어버이 된 자는 두세 자녀 혹은 여남은 자녀라도
한결같이 골고루 어루만져 사랑할 것이건마는 실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못했다고 그
어버이가 어버이답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참다운 어버이에게 증애(憎愛)의 정이 열렬한 것을
우리 주위에 일상 볼 수 있는 일이다.
이삭은 장자(長子) 에서를 사랑했고 그 처 리브가는 차자(次子) 야곱을 총애하였을 때에 그 어느 편의
용모가 잘났다 못났다 해서가 아니요, 자식의 우열로 인함도 아니요, 효성의 고하로 판단도 아니요,
오직 아버지의 사랑은 에서에게로 쏠렸고 어머지의 애정은 야곱에게 극진하였다 할 것뿐이다.
까닭도 없고 동기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요, 리브가는
에서의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다. 저들은 모두 참 아버지와 참 어머니의 조상이었다.
이후로 백천대(百千代)의 많은 가정에 비극이 없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불공평으로 인한 비극도
천만대(千萬代)의 성도(聖徒)의 가슴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에서의 아버지가 동시에
야곱의 아버지였고 야곱의 어머니가 동시에 에서의 어머니였던 것처럼 지공무사하게 보여서
쾌심(快心)한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불공평하게 보여서 답답할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공평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좋으나 불공평한 하나님을 찬송해 내는 믿음은 더욱 좋은 믿음이다.
1938년 7월. 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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