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던 또 다른 영화
주인공이 있다. <굿모닝 베트남>에서
애드리안 크로나워(로빈 윌리암스 분)의 조수였던
에드워드 개릭 하사가 바로 그다. 개릭은 타이어
없는 자전거를 타고 사이공 거리를 질주한 후
크로나워에게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난 죽을 뻔했어요! 몸이 붕 뜨나 싶더니 글쎄 내 코앞으로
트럭 타이어가 굴러가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게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안 내 인생 전체가 눈앞에
펼쳐지더라구요. 그런데 그 때 나를 가장 겁자게 했던 게
뭔지 아세요? 이것은 바로 내 삶이 너무 빤하고
무미건조했다는 점이었죠!”
우리 자신의 삶을 흑백 영화로도 만들 수 있고, 총천연색
영화로 만들 수도 있다. 흑백 영화 같은 삶에선 옳고 그름,
좋은 녀석과 나쁜 녀석, ‘우리’와 ‘그들’이 분명하다.
그런 삶의 주인공은 마치 인간 요요처럼 행복과 슬픔,
승리와 패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된다.
그 양극의 한쪽을 경험하기 위해선 반드시 다른
한쪽을 교대로 경험해야만 한다.
일종의 일괄 거래라고나 할까?
반면에 총천연색 삶은 심판이 아닌 창조적 자기 표현에
토대를 둔다. 사람, 사건, 경험은 심판하고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닌 즐기고 배우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나룰 필요가 없으며, 얼마든지
그 모든 것의 풍요로움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여행을 기쁘게 만들어주는 무한한 범위의 색조, 깊이,
강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카를로스 카스타테다의
돈 주앙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으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여행 자체를 즐긴다.”
오랜 세월 동안 색깔이 불명확하거나 사라진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자신의 산택 여하에 따라 삶에 영혼의 색깔을
입힐 수 있다. 삶은 용서와 친절과 다시 태어남이다.
새로 시작할 기회는 언제나 있다. 시멘트 틈새로 힘있게
자라나는 잡초를 보고 경이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최근에는 버려진 테니스장에 다시금 녹생의 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작고, 가냘프며, 금세 부서질듯한
풀잎들이 그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나온 광경은
정녕 무한한 자연의 감동과 전율을 전해주었다.
대자연은 그 속에 놓여진 것은 무엇이라도 치유할 힘을
갖고 있다. 우리는 꿈들의 씨앗을 억누르는 짓을 중단하고
참된 비전으로 그것들을 개발해야 한다. 창조주가 우리의
과거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로 현재의 빛에 그림자를 드리워선 안 되리라.
지금 이 순간만이 삶이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인 충만한
자기 표현은 가슴이 명하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시작된다.
조조 댄서의 삶은 우리 자신의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그려주고 있다. 우리 개개인은 그런 놀라운 비전으로
자신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대부분이 그 길에서 벗어나
벼렸다. 우리 개개인이 그런 비전을 실현할 권리를
되찾을 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에 더
가까워지리라. 모든 두려움과 거짓된 우상을 자신의
앞길에서 치워버리라. 지금 삶이 당신을 부르고 있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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