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큰 그림을 들여다보라
위대함.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오는 <조조 댄서>(Jojo Dancer)라는
호소력 있는 영화에 출연하여 한때 자신으로 하여금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었던 상황들을 당당하고 용감하게 묘사했다.
조조는 창녀와 마약 중동자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겪은 고통스런 사건들을 극복한 끝에
존경받는 코미디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조조가 평판이
나쁜 술집에서, 갱단과 맞닥뜨리고, 불성실한 친구에게 실망하며,
여러 여자와 고통스런 부부 관계를 맺어온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에서 길을 잃고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조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점점 더 심각한 거짓말을 늘어 놓다가
막다른 궁지에 몰려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불을
이용하여 자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계획했던 일이
으레 그랬듯이, 자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조조는 목숨을
건진다. 그것도 아주 간신히.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신이 평생 내려온 결정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제까지 그의 시야를 가려온 속좁은
마음의 부정적인 베일을 모두 걷어버리고 드넓고 너그러운
진아(眞我)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니 조조는 각박한 삶에 넌더리를 내며, 고통과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어른의 몸을 가진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맑은 의식과 영혼의 지혜를
갖춘, 사랑스런 어른 조조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한 통찰력이라는
안내자(조조의 고차원적인 의식)는 화상을 입은 환자가
사랑과 명징성과 깊은 이해력의 눈길로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볼게
해주었다. 결국 조조는 진아의 시각을 통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의 참된 목적을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보다 큰 그림을 발견했으며,
그러한 깨달음은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바로 그 순간에 조조의 아내는 의사를 돌아보며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이이가 살 수 있을까요?
의사는 잠시 그녀의 눈길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불가능합니다.”
조조는 자신의 몸상태를 돌아보고 겁이 덜컥 났다. 이전엔 죽고 싶었지만
지금은 살고 싶다. 그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발견했다. 이제 그에게는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생겨난 것이다. 그는 또 다른 기회를 원했다.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조조는 눈을 뜨고, 아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살고 싶다고. 그리고 결구구
그는 그렇게 됐다. 조조 댄서는 삶을 선택했고, 리처드 프라이오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 치유되었다.
더 나아질 때까지 고통은 계속된다.
조조처럼 당산과 나도 각자의 살아야 할 삶이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성취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은 내 손에
달려 있고, 당신 역시 자기 뜻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걷는 법을 가르쳐주고 격려할 수 있지만
실제로 길을 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내가 자신의 운명을 따르지 않을 때, 우주는 어딘가 부족해진다.
또한 나도 내 자신이 지금보다 나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슴 속에서 기이한 공허함을 느낀다. 가슴 속에 고통이 파고들지 않는가?
그러한 자잘한 고통은 더 나은 존재가 되라는 부름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결코 지치지 않는 안내자가 있어 나만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추기도 있다.
또 다른 영화인 <백 투더 퓨처>는 우연히 1950년대의 과거로 되돌아간
10대 소년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는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현재 시간대로 돌아와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현재 세계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바뀌게 된다.
마티는 지갑 속에 있는 가족 사진을 보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에 찍힌 그의 형상은 점점 희미해지는데
이는 세상이 그가 태어나지 못했을 상태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그의 몸은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엔 얼궁의 미세한
흔적만이 사진에 남는다. 마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 작적을 개시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행도을 개시하여 성공을 거둔다. 그러자 사진
속에서 그의 얼굴과 몸은 즉각적으로 완벽한 형상과 색깔을 되찾는다.
삶이라는 사진 속에 우리의 모습이 찍혀 있다. 자신의 일에 소홀하다면
인생이라는 사진 속의 우리 모습 역시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백 튜더 퓨처>에서처럼 우리가 운명 속에서 제자리를 잡는 데는
일종의 모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티처럼 우리도 결국 성공하게
되리라. 우리는 모두 어떤 이유로 인해 이 땅에 태어났으며, 자상에서
겪는 모든 모험은 그 진정한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배움의
일부분인 것이다.
가슴으로 잘 살았는가?
최근 들어 임사 체험에 관해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신도 아마
임상적으로 일정 시간 동안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난 사람들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읽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삶에 직면한 체험담을 연구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죽음 이전의 삶이 존재했는가?”일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먹고, 일하고 섹스하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사는 척 폼을 잡고, 진정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며, 상징이나 학위와
같은 갖가지 사회적 상징들을 끌어 모으고, 유행어를 말하면서도
충만히 살아 있지 않는 거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인생에선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태이냐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다. 진실된 가슴과 용기가 있는가? 목적의식, 정직성, 창조성,
표현력, 민감성,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거나 놀 줄 알고 현재 속에
충만히 조재하고자 하는 의지들이야말로 주요한 것이 아닐까?
당신이 현재 속에 충만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자문해보라.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당신은 혹시 지식으로, 일로, 과거로,
미래로, 알콜로, 마약으로, 은행 계좌로, 여자 친구로, 자동차로,
올바르게 살겠다는 말뿐인 다짐으로 도피하지 않았는가?
나 역시 이따금씩 그런 심리적 목발에 의지하면서 그것들의 분명한
공통점, 즉 그것들은 한결같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자 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선언했다.
“내 삶은 타고 남은 초가 아니다. 인생을 완전히 불태운 사람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나 역시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살았다. 가슴으로.”
그 말을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난 지금 이 순간,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 말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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