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1
명상은 사람의 지적 영신적 삶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명상은 깨어 활동하며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자체입니다.
그것은 영신적 놀라움입니다.....
명상은 그 원천을 설명할 수 없지만 희미하게 압니다.
그러나 이성과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 확신합니다.
명상은 이성과 믿음이 본질적으로 염원하는 일종의
영적 통찰력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통찰력이 없으면 이성과 믿음은
끝내 불완전한 것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보지 않으면서" 보고 "알지 못하면서"
알기 때문에 통찰력이 아닙니다.
명상은 보다 깊은 믿음이며
형상이나 말, 명확한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지식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새 명상의 씨 중-
생각과 나눔 / 지붕과 쉼
우리는 관상의 방법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명이 살아 있음을 충분히 의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영안에 거하심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 생명력을 충분히 인식한다는 것은
영신적 삶의 최고의 상태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성적인 묵상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각 기관들이 처음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지 않을까요?
"보지 않으면서 보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그 상태...
우리는 관상의 상태에서 이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도무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알게 되어집니다.
도무지 보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을 뵙게 됩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체험입니까?
우리는 체험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러한 체험의 차원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체험에 매료되어서
본질이신 하나님을 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로 변하게 되지요.
관상의 명상속에서 우리는 '기도가 안됩니다'라는
고백을 포기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기도인지
어떤 것이 기도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오늘 토마스 머튼의 말 앞에서 함께 묵상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보지 못하면서" 보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에 대함입니다.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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