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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본회퍼-간단한 살핌 04-성도의 공동생활

하나님의 사람들

by 지심 정경호 2008. 10.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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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소리엘 미니스트리 Ⅱ.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 1939) 1. 여러 학자들의 견해 본회퍼는 간디(Gandhi)의 친구요 그의 전기작가인 앤드루(C.F.Andrews)의 소개로 인도에 가서 간디에게서 비폭력 평화주의를 배우려고 하던 중 고백교회의 부름을 받아 포메라니아(Pomerania)에 있는 고백교회의 목사 후보생 양성 교육의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1935년 4월 26일에 발트해에 위치한 징스트(Zingst)에서 25인의 학생을 만났다. 그후 이 비합법적(히틀러의 금지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신학교는 쉬텐틴(Stettin) 근처에 있는 핀켄발더로 옮겨졌는데 본회퍼는 독일에서 보기 드문 신학교육을 실천하였다. 1935년 3월 11일에는 덴마크와 스웨덴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에 본회퍼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강연하였으며 1936년 8월 독일 히틀러치하의 올림픽 대화가 있었는데 「다윗왕」(King David)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 재건」 (The Reconstruction of Jerusalem according to Ezra and Nehemiah)을 제외하고는 1936년의 본회퍼의 글들이 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본회퍼는 “누구든지 독일의 고백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까지 말함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39년에 가서는 2년 정도의 핀켄발더의 공동체 생활을 글로 펴냈으니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도의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Life Together)이다. 필립스는 이미 우리가 논한대로 본 『성도의 공동생활』은 고백교회의 반히틀러 항쟁을 배경으로 산출된 작품으로 『제자의 길』과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데 월펠(Woelfel)은 교회 공동체의 공동체적 훈련과 개인으로서의 크리스쳔의 실존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월펠은 『성도의 공동생활』에 나오는 “교회”와 『옥중서신』에서 강조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순응하면서 초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양면성이라고 한다. 즉 크리스쳔 개개인이 세속적인 세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공동생활』이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필립스의 주장대로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결코 소종파적 냄새나 분리주의적 소그룹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본회퍼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catholic), 기독교적 교회”를 중요시하고 있다. 2. 본문분석 본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제 1장은 공동체, 제4장은 섬김, 제5장은 죄의 고백과 성도의 교제로 되어 있다. 제 1 장 : 공동체 본회퍼가 예수님께서 원수들 사이에 사시면서 평화와 하늘나라를 수립하신 것에 유비하여 교회 공동체 역시 원수들 사이에 살면서 자기에게 위탁된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을 역설할 때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대면해 있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는 히틀러를 찬양하는 “독일의 크리스쳔들”과 히틀러에 항거하는 성도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본회퍼는 “신자”와 “불신자”를 엄연히 구별하면서 “한 개교회가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에 참여하기 위하여 가시적으로 회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동시에 본회퍼는 위와같은 가시적 교회의 사귐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외롭게 경험한 영적인 성도의 교제 혹은 불가시적 성도의 교제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의 초점은 가시적 혹은 구체적 교회공동체에 집중되어 있다. 본회퍼는 다른 믿는 형제의 현존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운 현존”과 “몸으로 현존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다. 따라서 본 『성도의 공동생활』은 불신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로서 실존하시는 그리스도”(Christus 민 Gemeinde existierend)를 말한다. 본회퍼가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요,...우리 기독교인들이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라고 주장할 때, 가시적 혹은 구체적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첫째로, 종교개혁신학이 말하는 이신칭의를 구원이라고 보는데 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의 교제를 전제한다고 본다. 두 번째로, 본회퍼는 우리 믿는 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만 다른 신자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셋째로, 본회퍼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사 성육신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라고 하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서 선택되었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연합 관계에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위의 세 주장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밑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릳르의 구원이 무엇이고, 우리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는가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업에 의해서 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회퍼는 교회란 성령과 말씀에 의해서 규정된 공동체요 다른 인간 공동체들은 “인간정신이 지닌 자연적 충돌들, 힘들, 능력(기능)들”로부터 나온 것이라 했고 교회는 아가페(Agape)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며, 세상은 에로스(Eros)에 의하여 지배되며, 교회는 “영적”(Pneumatic)이고 세상은 “정시적” 혹은 “인간적”이라고 할 때에 어거스틴(Augustine)의 “두 도성”을 생각나게 하며 니그렌(Nygren)의 “아가페와 에로스”를 생각나게 한다. 제 2 장 :“ 다른 사람들과 사는 하루 본회퍼가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란 다른 성도들이다. 그는 성도들과 사는 하루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았고 이처럼 구체적으로 산 삶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본 『성도의 공동생활』이다. 본회퍼는 새벽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이때에 본회퍼가 그의 기도와 찬송을 드리는 대상, 곧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본회퍼는 기도에 관하여, 성경 중 시편의 대부분은 기도라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이 시편의 기도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많은 부분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기도로서 그리스도는 교회와 더불어 그리고 개개 신자들과 더불어 이 시편의 기도 내용을 하나님 존전에 올렸다고 본회퍼는 본다. 본회퍼는 시편의 기도, 성경읽기에 이어 찬송이 뒤따라야 할 것을 역설한다. 찬송에 이어 본회퍼는 회중의 합심 기도, 나아가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는 기도로 들어갔다. 본회퍼는 그 다음 말씀, 곧 영생의 양식을 먹고 다시 교제와 기도와 교제의 찬송을 한 후 일용할 양식을 먹었다. 본회퍼는 예수님께서 세 가지 종류의 식탁 교제를 가지셨다고 본다. 매일매일의 식탁교제, 주님의 만찬석의 교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마지막 식탁 교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본회퍼는 이 식탁에서 주어지는 선물 사이의 관계를 세 가지로 본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이 우리의 세상의 주요 창조주로서 이 모든 식탁 선물을 주신 분으로 인식한다...두번째로 우리는 이 식탁 교제에서 모든 지상의 선물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주어진 것임을 인정한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회중은 예수님의 임재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 회중의 주님은 곧 임재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본회퍼는 하루의 일과를 들어간다. 본회퍼는 식사 후부터 저녁까지는 기독교인이 일해야 할 시간이라고 한다. 보회퍼는 기도와 일(orare et laborare), 일과 기도라고 하는 수도원적인 삶의 한 모습을 실천하였다. 본회퍼는 우리가 “일의 세계”에 들어갈 때에 비인격적인 사물들의 세계인 “그것”(It)의 세계에 들어가는 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뚫고 “당신”(Thou)과의 관계를 계속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의 인용들은 점심시간과 저녁식탁의 교제 및 잠자리에 들기 전의 성도의 삶에 대하여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점심 시간에는 가능하면 일의 행진을 잠깐 멈추고 쉼을 갖고 점심을 한다. 하루의 반이 지나갔다. 공동체는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녁까지 지켜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한다...하루는 주님께 속한 것이다. 그래서 하루의 중간에도 우리 크리스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초대하시는 점심식사에 임해야 한다...” 본회퍼는 저녁시간에 다음과 같이 했다. “크리스쳔 가정은 다시 함께 모여 앉는다. 저녁식탁에 둘러 앉아 마지막 예배를 드린다.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게 유하러 들어가시니라’(눅 24:29) 하루의 끝에 저녁 예배를 올리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이 예배의 하나님의 말씀이 밤에 쉬기 전에 주어지는 마지막 말씀이다. 밤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의 참 빛이 교회를 위해서 더 밝게 비추인다. 시편의 기도, 찬송, 공동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듯이 우리는 이것으로 하루를 끝낸다....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우리는 모든 기독교 세계 위에 하나님이 추복을 내려주시고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의 회중, 이 교회에서 목회하는 교역자, 가난한 자, 불쌍한 자, 외로운 자, 병든 자, 죽음의 자리에 있는 자, 우리의 이웃, 우리 국내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교제를 위해서 기도한다.” 제 3 장 : 홀로 사는 하루 지금까지 본회퍼는 공동체적 성도의 삶에 대하여 말했으나 지금은 홀로 있음, 명상, 기도, 및 성경 묵상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성경 명상, 기도, 대도를 위해서 홀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틸리히(Tillich)의 경우 “개인”(individual)과 “참여”(participation)가 서로 맞물고 있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듯이 본회퍼에 있어서 “홀로 있음”(solitude)과 침묵은 공동체적 삶과 맞물려 있다. 제 4 장 : 섬 김 본회퍼능 여기에서 “혀를 어거하는 섬김”, “온유함으로 섬기기”, “귀기울여 청종하는 섬김”, “남을 돕는 섬김”, “남의 잘못을 감당하고 감수하는 섬김”, “말씀 선포의 섬김”, “권위의 섬김”을 말할 때에 “섬김”의 대전제로서 누가 9:46이하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를 인용한 다음 칭의(구원)와 섬김의 관계를 자연인(不信者)의 자기 정당화와 다른 사람에 대한 심판에 대조시킨다. 제 5 장 : 고백과 교제 본회퍼는 여기에서 복음과 만인제사장의 의미를 더 명확히 밝힌다. 그는 "교제에로의 돌파”, “십자가에로의 돌파”, “확신에로의 돌파”, “누구에게 우리는 죄를 고백할까?”, 및 “기쁜 성례:성찬”을 논할 때, ...만인제사장 교리를 전제한다...본회퍼는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를 인용하면서 교회가 공동체적 예배와 기도에 모두 참석하여 교제할지라도 서로가 하나님 존전에서 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망각할 때, 각 개인들은 고독에 떨어진다. 그리하여 결국 올바른 복음 이해만이 성도의 고제에로의 돌파를 가능케 하며 그리스도(little christ)로서 성도들 상호간의 죄의 고백와 죄의 용서만이 이 교제를 원할케 한다. -김형기의 "본회퍼의 신학사상" 중에서- - 샤수공
출처 : 샤마임 수도원 공동체
글쓴이 : 지붕과 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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