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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임 영성 이야기 2161 /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입다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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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심 정경호 2022. 2. 2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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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임 영성 이야기 2161 /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입다의 딸
 
샬롬^^
오늘도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영혼 위에~^^

 

 
주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일정들이 빼곡합니다. 겹치는 일도 많고 장거리를 가야 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체력관리를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제는 '샤마임 말씀과 설교 연구원'에서 드디어 책 한 권이 출간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설교 연구 1. 예수님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내일쯤 출간됩니다. 샤마임에서 정기적으로 출간되는 책으로 누구가 쉽게 다가설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연구물들이라 생각됩니다. 그 동안 신학적인 부분에서 깊이 있는 책들을 주로 출간했지만, 앞으로는 말씀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설교와 묵상 시리즈가 계속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기에, 이번 출간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싶습니다.
 
오늘 묵상은 사사기 11장 34-40절 말씀입니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입다가 자신의 집에서 처음 자신을 영접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 서원했는데, 그 대상이 자신의 사랑하는 무남독녀였습니다. 자신의 딸을 바라보면서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로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에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35)"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받은 입다의 딸이 고백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롸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35)"라고 아버지의 서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입다의 딸이 자신을 위해서 두 달만 여유를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처녀였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일평생 결혼하지 못하고 주님의 성막에서 처녀로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두 달의 기한 동안 처녀로 죽음을 맞이할 인생을 위해서 애곡할 시간을 갖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이를 입다가 허락하게 됩니다. 그 후에 입다의 서원에 의해서 입다의 딸은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본문에 대한 오해들과 신학적 논쟁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인데, 37절에,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라는 번역을 원문으로 해석하면,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9저에서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40절의 "애곡하더라"라는 단어를 "찬송하더라"라고 해석돼야 한다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의식은 '축제'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의 차이는 하나님의 법에 인신제사에 대한 엄격한 금지를 이야해왔던 구약의 유법에 합당하게 해석되는 것으로 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입다는 하나님의 성전에 평생 살아갈 대상으로서 드릴 것을 서원했고, 입다의 딸은 서원대로 일평생 처녀로 하나님의 성막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무남독녀였기에 입다의 마음이 찢길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입다의 서원이며, 이 서원으로 인해서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입다의 딸을 위하여(40)"라는 말씀에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입다가 자신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갈등하고 있을 때,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함을 분명하게 강조하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서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으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희로애락의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맞이하고 자녀를 낳는 일들에 대해서 비워낸다는 것은 여인으로서 너무도 어려운 일이며, 이와 같은 일생을 사는 것은 한 영혼이 죽음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이 길을 결단성 있게 들어서게 됩니다. 그녀의 결단은 아버지 입다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에 대한 승리의 열매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기에 성서는 아름답게 이 부분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는 입다를 신앙의 인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의 서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의 일생을 포기했지만,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명예와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받는 거룩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
사랑과 자비의 주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님 앞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질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입다의 결단과 그의 딸의 순종의 받아들임을 보고 배우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서원했기에 끝까지 자신의 무남독녀까지도 받친 입다의 믿음과 그것을 받아들여서 일평생 성막에서 봉사하는 직을 받아들인 독신의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만이 좋은 것이 아님을 새롭게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고 부르심의 자리에서 감당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느 날
팔라마스 보나벤투라 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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