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마임 영성 이야기 2186 / 고난주간 3 /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오늘도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영혼 위에~^^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이 땅에 인카네이션 하신 우리 주님에 대한 깊은 묵상의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모든 일들을 이루시기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지만, 개인적인 의문은 굳이 꼭 십자가여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제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기도 합니다. 물론 죄 사함의 원리와 구원의 원리를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성서를 통해서 충분하게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의 고난 받으심이 마음에 저려옴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땅에 살아가는 인류라는 존재가 십자가의 가치를 받아들일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전히 세상은 악하고 전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가운데, 인류에게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성서의 메시지는 저로 당혹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들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 모습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치장을 하고 사랑한다 말을 하지만, 저 심련의 밑바닥에서는 여전히 거룩하지 못한 모습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처럼 여전히 주님은 사랑하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계시다는 점은 부인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증명으로 고난주간의 모든 여정과 십자가의 역사가 우리 앞에 서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마태복음 22장 23-33절 말씀입니다.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신 시대의 유대인들은 크게 두 사상을 가진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라는 경건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사두개인이라는 현실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정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두개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이들에게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는 불만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님께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삭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4)"라고 말하면서 계대결혼법의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에게 한 여인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상속자 없이 죽게 됩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죽게 되고, 마지막에 이 여인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라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쳐주시기 시작하십니다. "너희가 성경고, 하나님의 능력고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9-30)"라고 부활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32)"는 메시지를 이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32)"는 가르침으로 사두개인들의 중심을 꿰뚫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요 사상은 현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의 문제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풀어주심과 함께 사두개인파들이 고심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정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영혼들이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이 시간이라는 삶 속에서 공간을 거룩하게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체험해가는 영혼에게 허락되는 역사인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부활의 역사 안으로 종국에는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32)"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모습 중에서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2,000여년의 역사 속에서 각 민족의 상화에 따라서 변화되며 발전되었기에 사상과 신학이 매우 다양하게 변화 발전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입니다. 토속신앙이라는 형태의 믿음이 각 민족마다 다르게 발전하다 보니까, 자꾸 성서를 오해하며 믿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의 문제는 외적 가난에 대한 잘못된 편견의 신앙입니다. 물론 성 프란시스와 같은 분들은 '심령의 가난'을 이루기 위해서 외적 가난의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삶에 보호자가 되어주는 교회의 틀을 허락하셔서 그들로 심령의 가난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이 꼭 외적 가난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충분한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요 방랑하는 자로서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그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충분하게 받안 자들이었지만, 그 안에 자족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더 깊고 높고 넓게 추구했던 영성가들이이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은총의 복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것들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부활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알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므로 우리 또한 죽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심령이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혜의 복을 받아 누리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쓰임 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